최태원 SK그룹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이혼소송 과정에서 다시 불거진 노태우 전 대통령 일가의 추가 비자금 의혹에 대해 검찰이 강제수사에 착수했다. 고발장이 접수된 지 1년 10개월 만이다. 검찰은 노 전 대통령의 부인 김옥숙 여사가 아들 노재헌 주중대사가 운영에 참여한 재단에 건넨 152억원의 출처와 이동 경로를 집중적으로 들여다보고 있다.
서울중앙지검 범죄수익환수부는 지난 21일 김 여사의 서울 연희동 자택과 동아시아문화센터, 노태우센터 등을 압수수색했다. 노 전 대통령 일가의 비자금을 차명계좌로 관리하거나 자금 관리에 관여했다는 의혹을 받는 전직 비서관들의 자택도 강제수사 대상에 포함됐다.
이번 압수수색은 2024년 노 전 대통령 일가의 추가 비자금 의혹과 관련한 고발장이 접수된 이후 처음 이뤄진 강제수사다. 검찰은 그동안 금융계좌 자료를 확보해 자금 흐름을 추적해왔으며 압수수색을 통해 확보한 자료에 대한 분석에 들어갔다.
수사의 핵심에는 김 여사가 노재헌 대사가 이끌었던 두 재단에 건넨 152억원이 있다. 검찰은 이 돈이 과거 노 전 대통령이 조성한 불법 비자금과 연결돼 있는지를 추적하고 있다.
특히 검찰은 152억원 가운데 120억원이 2020년 이후 재단에 전달된 점을 주목하고 있다. 압수수색 영장에 적시된 범죄수익은닉규제법 위반 혐의의 공소시효는 7년이다. 검찰은 최근까지 자금 이동이 이뤄진 만큼 공소시효 문제는 당장 수사의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있다.
30여 년 전 자금이 다시 수사선상에 오른 계기는 최 회장과 노 관장의 이혼소송이었다.
노 관장 측은 이혼소송 과정에서 모친 김옥숙 여사가 보관하고 있던 1991년 선경건설 명의 약속어음과 이른바 "선경 300억" 메모 등을 증거로 제출했다. 노 전 대통령 측 자금 300억원이 최 회장의 부친인 최종현 선대회장 측으로 전달됐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과거 비자금 문제가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최 회장 측은 노 전 대통령으로부터 300억원을 받은 사실이 없다며 이를 부인해왔다.
대법원은 이혼소송에서 비자금 300억원의 실재 여부 자체를 확정하지 않았다. 다만 원심 판단처럼 노 전 대통령이 최종현 선대회장에게 약 300억원을 지원했다고 가정하더라도 대통령 재직 중 받은 뇌물에서 비롯된 불법 자금이라면 재산분할 과정에서 기여로 보호할 수 없다는 취지로 판단했다.
검찰 수사는 이혼소송에서 다루지 않았던 형사책임과 범죄수익 환수 문제로 향하고 있다. 과거 300억원이 실제 존재했는지, 어떤 경로로 이동했는지, 김 여사가 재단에 출연한 152억원과 연결되는지가 핵심이다.
하지만 검찰에 남은 수사 시간은 길지 않다.
오는 10월 2일 검찰청이 폐지되고 직접수사권이 없는 공소청 체제로 전환될 예정이다. 현재 수사를 진행하는 검찰이 약 40일 뒤에는 공소청으로 바뀌는 만큼 수사권 전환 문제가 변수로 떠올랐다.
공소청법 부칙에는 불가피한 경우 기존 검찰이 진행하던 사건에 대해 10월 2일 이후에도 90일 동안 추가 수사를 할 수 있는 규정이 마련돼 있다.
문제는 개정 형사소송법과의 관계다. 형사소송법에서는 추가 수사를 이어갈 수 있는 대상을 송치 사건으로 규정하고 있어 검찰이 직접 수사에 착수한 노 전 대통령 일가 비자금 사건까지 90일 추가 수사 대상에 포함되는지를 놓고 해석 논란이 발생할 수 있다.
수사가 장기화할 경우 다른 수사기관으로 사건을 넘겨야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1990년대 초반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자금의 조성과 이동 경로를 추적해야 하는 만큼 수사기관이 바뀔 경우 사건 기록과 금융자료 분석을 넘겨받는 과정도 필요하다.
불법자금이 확인될 경우 이를 국고로 환수할 수 있는 법적 장치는 이전보다 강화됐다.
국회는 지난 20일 범죄자가 사망하거나 국외로 도피하는 등 형사재판을 진행하기 어려운 경우에도 범죄수익을 몰수·추징할 수 있도록 하는 이른바 "독립몰수제" 관련 법안을 본회의에서 처리했다.
기존에는 범죄수익을 몰수하려면 원칙적으로 범죄자를 기소하고 유죄판결을 받아야 했다. 당사자가 사망하면 형사재판 자체가 불가능해져 범죄수익을 환수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독립몰수제가 시행되면 범죄자가 사망하거나 국외 도피, 소재불명 등으로 형사재판을 진행할 수 없는 경우에도 일정한 요건을 갖추면 범죄수익에 대해 별도의 몰수·추징 절차를 밟을 수 있게 된다.
이에 따라 재단으로 넘어간 자금이 과거 노 전 대통령이 조성한 불법 비자금과 연결돼 있다는 사실이 확인될 경우 환수 여부도 본격적인 검토 대상이 될 수 있다.
다만 재단에 전달된 152억원이 곧바로 노 전 대통령의 불법 비자금으로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검찰이 해당 자금의 출처와 이동 경로를 확인하고 과거 범죄수익과 현재 남아 있는 재산 사이의 연결고리를 증거로 입증해야 한다.
노 전 대통령과 최종현 선대회장은 이미 사망했고 의혹이 제기된 자금의 출발점은 1991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금융실명제 시행 이전 거래까지 복원해야 하는 데다 수십 년 동안 여러 계좌와 재단 등을 거쳤는지도 확인해야 한다.
고발 이후 1년 10개월 만에 시작된 강제수사는 검찰청 폐지까지 약 40일을 남겨놓고 속도를 내게 됐다. 검찰이 이 기간 동안 152억원의 출처와 과거 300억원 비자금 의혹 사이의 연결고리를 어디까지 밝혀낼 수 있는지, 수십 년 전 조성된 것으로 의심받는 자금을 현재의 범죄수익으로 입증할 수 있는지가 수사의 핵심 쟁점이다.
이수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