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오스트리아 수교 130주년을 기념, 오스트리아 빈미술사박물관과 함께 기획된‘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특별전이 지난해 10월 25일(화)부터 국립중앙박물관 1층 기획전시설에 개최되었다. 코로나 방역 지침 완화와 계절적 영향도 있었겠지만, 간만에 미술 애호가들의 극찬과 호평이 이어져, 원래 마감 예정된 3월초에 2주간 관람이 연장되어 3월 15일까지 국내외 관람객 32만명 이상이 다녀갔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작품 총 96점은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기의 대표적인 예술품을 포함하여 합스부르크 왕가가 15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수집한 매혹적인 걸작들이라 합스부르크 왕가의 예술품 수집의 역사 속에서 새롭게 이해하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유럽 최고의 가문, 합스부르크를 이해하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루돌프 1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등극한 1273년부터 왕정이 몰락한 카를 1세의 1918년까지 약 600년 간 유럽 역사의 중심에 있었다. 한때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로 유럽의 광활한 영토를 다스리기도 했던 합스부르크 왕가는 30년 전쟁, 스페인과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제1차 세계대전 (사라예보 사건) 등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특히 우리가 잘아는 프랑스 혁명 때 단두대의 희생양이 된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도 이 집안 출신이다.
이들은 루벤스, 벨라스케스, 반 다이크와 같은 서양미술사의 걸출한 화가들의 후원자이며. 그들로부터 놀라운 안목을 넓히고 에술품 수집가 집안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이들의 예술에 대한 열정과 남다른 철학을 바탕으로 수집한 예술품은 빈미술사박물관으로 집대성되어 오스트리아를 넘어 인류의 자산이 되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역사와 예술을 함께 보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유럽의 패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던 15세기의 막시밀리안 1세를 시작으로 20세기 초까지 수집된 얘술품을 엄선하여 총 5부로 구성하였다.
들어가며 ‘더 멀리, 합스부르크가의 비상’은 신성로마제국 황제에 오른 막시밀리안 1세 초상화를 중심으로 시작 .
1부 ‘황제의 취향을 담다, 프라하의 예술의 방’은 루돌프 2세 황제의 중심으로 16세기 금속 공예품도 전시.
2부 ‘최초의 박물관을 꾸미다, 티롤의 암브라스 성’
3부 ‘매혹의 명화를 모으다, 예술의 도시 빈’은 빈미술사 박물관의 명성을 높인 명화를 집중적으로 전시. 특히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흰 옷을 입은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와 피터르 파울 루벤스의 <주피터와 머큐리를 대접하는 필레몬과 바우키스>은 모든 관람객의 눈길을 끌었다. .
4부 ‘대중에게 선보이다, 궁전을 박물관으로’는 18세기 마리아 테레지아의 시대로 <마리아 크리스티나 대공의 약혼 축하연>과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를 전시.
5부 ‘걸작을 집대성하다, 빈미술사박물관’은 19세기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시대로 1857년에 빈의 도시 확장 프로젝트일환으로 빈미술사박물관을 건축했다. 또한 그들 왕족은 그들의 왕가 중심의 근친혼 등으로 유전학전 이상 징후까지 암시하는 등, 이들의 슬프고도 비극적인 19세기 말 황실 분위기도 과감하게 전시했다.
또한 눈에 띄는 익숙한 우리나라 조선시대 갑옷 및 투구가 마지막 작품으로 전시되었는데, 구한말 고종이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선물한 조선의 갑옷과 투구로. 빈미술사박물관은 이를 1894년에 소장품으로 등록하고 지금까지 소중히 보관해왔다고 한다. 오스트리아와 조선의 수교 기념으로 주고받은 마음의 증표로서 수교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을 것이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예술이 곧 힘이자 지식이고 권력”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순탄하지 않은 역사 속에서도 600년간 수집한 예술품들을 빈미술사박물관에 남겨 두었고. 오스트리아 국민들에게는 스스로 열정적인 예술 수집가이자 후원자였던 그들의 후손이라는 자부심도 상당할 것으로 이해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간송미술관. 리움미술관 등 개인이나 민간 기업에게 많은 예술 부흥 및 문화재 수집 역할을 맡기는 차원을 넘어 선진국 대열에 오른 현 시점에서 문화강국으로서 범정부 차원에서 문화예술의 부흥 역할을 이끌어 나갔으면 하는 새로운 메시지를 배우고 되새겨본다.
물리적 힘보다 문화와 예술 역량이 더 높게 평가되는 오늘날, 합스부르크의 유산이 새롭게 조명되는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