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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와 갈등의 시대, 왕릉을 통해 본 17세기 조선
기사입력 2013-12-10 09:50 | 최종수정 12-10 10:09(편집국) | 기사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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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강순형)는 2006년부터 세계유산 조선왕릉의 역사와 문화를 종합적으로 조명하는 <조선왕릉 종합학술조사>를 수행하고, 그 결과물로 「조선왕릉 종합학술조사보고서(Ⅳ·Ⅴ)」를 발간하였다.

두 권으로 발간된 보고서에는 총 8기 왕·왕후릉에 대한 조사내용이 수록되었다. ▲ 제Ⅳ권에는 효릉(孝陵, 인종·인성왕후), 강릉(康陵, 명종·인순왕후), 목릉(穆陵, 선조·의인왕후·인목왕후), 장릉(章陵, 원종·인헌왕후) 4기를 수록하였고, ▲ 제Ⅴ권에는 장릉(長陵, 인조·인렬왕후), 휘릉(徽陵, 장렬왕후), 영릉(寧陵, 효종·인선왕후), 숭릉(崇陵, 현종·명성왕후)을 실었다.

보고서에 실린 능은 16세기 왕릉 양식을 마지막으로 계승한 효릉(1545·1578)과 강릉(1567·1575)을 제외하고 모두 17세기에 조성된 것이 특징이다. 인조의 장릉은 1731년 천릉(遷陵, 능을 옮김)된 것이나 1636년 조성 당시의 석물을 대부분 옮겨다 썼으므로 당시 왕릉조영 경향을 간직하고 있다.

이러한 왕릉 조성 배경에는 치열한 당쟁(黨爭) 속에서도 제도와 문물, 사상이 성숙해 가던 17세기의 과도기적인 시대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 동원삼강릉제(同原三岡陵制,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이웃한 세 언덕에 능을 조성)과 동원상하릉제(同原上下陵制, 같은 언덕에 위 아래로 능을 조성)이라는 새로운 능제(陵制)의 출현, ▲ 정치적인 논쟁 끝에 2개월 이상 소요된 영릉의 장지(葬地) 선정, ▲ 조선왕릉 최초로 건립된 영릉의 표석, ▲ 원(園)에서 왕릉으로 승격된 원종 장릉 등은 유독 천릉이 잦았고 능제 논의가 활발했던 이 시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번에 발간된 보고서는 각 능의 조성 경위, 천릉 과정에 대해 사료와 유물을 토대로 시간 순으로 복원하여 막연하게 알려져 왔던 이 시기 왕릉의 역사와 위상을 구체적으로 밝혔다. 특히 목릉 정자각(보물 제1743호)과 숭릉 정자각(보물 제1742호), 영릉 재실(보물 제1532호) 등 중요 건축물의 현황을 상세하게 소개하여 각 구성물이 담고 있는 시대적·문화재적 가치를 규명하는데 주력했다.

아울러 왕릉의 부재별 용어에 대해 산릉도감의궤(山陵都監儀軌)와 능지(陵誌) 등을 참고하여 가장 보편타당한 사례를 정리함으로써, 그동안 혼란스러웠던 용어 사용에 대해 일정한 기준을 제시하였다.

또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멸실되거나 파괴된 연지(蓮池), 재실(齋室), 어정(御井) 등 왕릉 구성 요소의 위치, 국장(國葬)과 제례 동선(動線) 등을 각종 문헌사료 대조를 통해 위치를 파악하여 능제 복원 계획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앞으로도 조선왕릉 조사보고서를 조선왕실 원·묘(園·墓)까지 확대하여 순차적으로 발간할 계획이며, 이를 통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릉에 대한 구체적이고 다양한 정보를 국민에게 제공할 예정이다.


숭릉 정자각

[자료제공 :(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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