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고
제목 : 모든 것이 허용된다.
가정이라는 공간은 보통 안정감을 주고 위로받는 곳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보통 가정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아직도 수많은 미혼 남녀들이 결혼해서 그 ‘행복한 가정’에 대한 이상에 빠져 퍼즐 찾기 하듯 대상을 찾아 나선다. 인간은 상상하는데 능한데, 특히 긍정적인 면에서 대단한 능력을 발휘한다. 가정을 꾸리는 사람들의 경우 그 기대는 훨씬 이상에 가깝고, 결혼은 개인 문제의 종결이라고 단정한다. 그러나 사실 가정이 가장 많은 폭력이 자행되고 은폐되는 공간이며, 사회의 문제아들은 가정에서 잉태되고 키워진다. 결핍된 애정과 억제된 분노가 가정을 벗어나 터져 나오는데, 이는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가진 양날의 검이다.
카라마조프의 가족들도 서로 멀리 떨어져 살며 폭력과의 거리를 유지하지만, 이들이 한데 모이는 그 회합하는 공간에서 서로의 욕심과 폭력성이 드러난다. 아버지를 포함한 3형제, 사생아 스메르쟈코프는 각기 다른 폭력성을 내재하는데, 그 방식만 다를 뿐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다. 세대라는 단어는 사랑에 의한 결실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아름다운 관계이지만, 사실 대부분 세대는 폭력과 화해라는 형식으로 숨겨져 있을 뿐 많은 문제를 내재한다. 많은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가정 내 폭력과 화해를 주요 모티브로 스토리텔링을 하지만, 실제 가정에서는 그렇게 아름다운 화해가 별로 일어나지 않는다. 이런 선정적인 테마는 비현실을 현실인 것처럼 속게 만든다. 세대 간의 갈등은 대게 그 상태로 끝나는 경우가 많고 극적으로 화해하는 사례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런 의미에서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은 지금의 미디어에서 보는 선정주의와는 다르게 가족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당신은 러시아를 닮았어요. 강인하고, 예측하기 힘들죠.’
이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전부 자신의 의견에 대해서는 매우 고집스럽고, 예측하기 힘든 성정을 지니고 있다. 그런 예측 불가능성이 사건을 촉발하고, 문제를 양산한다. 그러나 돈 욕심과 치정에 관한 문제를 넘어서 각 등장인물은 신의 존재에 대한 신학적 문제, 우주 공간에 대한 물리학적 이해, 죽음과 부활에 대한 철학적 문답을 통하여, 당시 서구사회가 가졌던 사상에 대한 비판의식을 보여준다.
1. 무신론 혹은 신경 신학과 신의 존재에 관하여
‘18세기에 어떤 노인이, 신이 없다면 만들어내야 한다고 말했어. 그래서 인간은 정말로 신을 만들어냈지. 신이 인간을 창조했느냐, 인간이 신을 창조했느냐의 논쟁은 접어 두기로 하자.’는 이반의 입을 통해 전달되는 무신론은 100년 이 더 지나 신경 신학이란 학문의 이름을 걸치고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과 같은 책에서 다시 떠오른다. 신의 탄생은 인간의 뇌 작용에 따른 호르몬 분비에 의한 것이고, 생명 세계에 나타나는 많은 존재는 설계자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연선택이라는 점, 도덕심을 가지기 위해 종교는 필요하지 않고, 선해지기 위해 신이 필요하지 않다는 주장을 한다. 같은 무신론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지만, 거기에 이르는 방식은 이반의 주장이 반어적이고 문학적이다. 유클리드식이고 지상의 지성을 가진 인간이 어떻게 이 세상 것이 아닌 문제를 풀 수 있겠냐는 질문에서 시작하여, 3차원적인 적인 뇌로 4차원에 거하는 신을 이해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라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평행선이 우주 어딘가에서 만나 눈으로 직접 보게 된다 하더라도 그것 또한 감각으로 경험하게 되는 현상이기에 왜곡될 수 있어서 차라리 어리석은 사람이 되는 것이 낫다는 이반의 ‘어리석음에 대한 예찬’은 설득력이 있다. 사람을 사랑하려면 그 상대가 숨어 있어야 하고 얼굴을 내미는 순간 사랑 따윈 사라져버린다는 주장도 왜 기독교의 신이 숨어 있을 수밖에 없는지를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근거가 된다.
2. 네크라소프의 시 그리고 가정 폭력
힘없는 말의 ‘순한 눈’에 채찍을 가해 수레를 끌게 만드는 폭력으로 드러나는 고통에서 느끼는 쾌락이 인간에게는 내재하고 있다. 입양아를 학대하여 죽음에 이르게 만든 사건들이 연일 언론에 등장한다. 자기가 무슨 일을 당하는지도 잘 모르는 조그마한 존재가 춥고 어두운 화장실에서 조그만 주먹으로 찢어질 것 같은 가슴을 두드리며 살려달라고 애원한다. 이렇게 기가 막힌 상황은 이 소설 속에 묘사되는 장면이지만, 150년이 지난 오늘 많은 가정이 안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선과 악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런 현상이 생기는 것이라는 상대성 논리를 매우 인간적인 관점에서 이반은 비판하고 있다. 너무도 많은 경우에 효도나 훈육이라는 도덕 아래 폭력이 정당화되고 있다는 점에 문제 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는 것 같다.
‘그런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그 빌어먹을 선악을 인식할 필요가 뭐냔 말이야? 인식의 세계를 전부 합쳐도 ’하느님‘께 흘리는 아이의 눈물만 못한데.’
3. 대 심문관
대 심문관으로 대변되는 교회 권력은 그 힘을 유지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재림을 꺼린다. ‘대답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시오, 당신은 당신이 이미 말한 것에 아무것도 덧붙일 권리가 없소, 왜 우리를 방해하러 온 거요?’ 부활 예수를 기다리는 교회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더 이상의 기적도, 신비스러운 체험도, 새로운 말씀도 필요 없다. 믿음에 대한 자유가 주어진 인간은 그 자유로 인해 오히려 더 번민하게 되고 스스로 자유를 반납한다. 이성적 추론과 회의를 통한 신의 존재 탐구는 유보한 채, 당장 필요한 지상의 양식을 주는 교회의 권위에 모든 것을 맡긴다. 하늘의 빵을 위해 수천수만이 그리스도를 따른다 해도, 지상의 빵을 무시할 수 없는 수천만의 사람들을 과연 약자의 하느님이 무시할 수 있을까? 선택된 소수만을 위한 기독교라면 그 나머지 약한 인간은 도대체 뭐가 되는가? 권력에 의한 사랑이 아니라 자유의지로 인한 선택으로 사랑받고자 하는 하느님의 선택은 너무 인간의 존엄을 과대평가한 것이 아닌가? 삶의 기로에서 무섭고 고통스러운 순간을 마주할 때, 지상의 삶이 아니라 믿음을 끝까지 지켜야 구원을 받게 된다면 과연 몇 명이나 신이 원하는 선택을 하게 될까? 본질적인 악함을 타고 난 인간이라면 왜 신은 인간을 창조했을까? 그리고 마지막 날에 하느님을 원망하는 다수와 찬양하는 소수가 있다면 과연 하느님은 얼마나 행복할까? 사실 이런 질문들은 어느 정도의 종교 생활이 깊어지면 독버섯처럼 생겨나는 것들이다. 다만 교회의 권위 앞에 쉽게 꺼내놓지 못하는 것들일 뿐. 그러나 이런 의문에 대해 그리스도는 조용히 입맞춤으로 답을 대신한다. 애초에 철학적 신학적 답변이 가능한 것이었으면, 그것은 철학이나 과학의 영역이고 신앙이 아닌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카라마조프가의 정신은 때로 저열하지만, 도전적인 동시에 체제전복적이기까지 하다.
4. 조시마 장로의 죽음과 악취 사건
살아생전 신과 동일시 되었던 조시마 장로의 죽음과 악취 사건은 인간의 믿음이 무엇을 향한 것이며, 신앙의 본질은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을 던진다. 신처럼 추앙받던 장로의 죽음 후 악취 나는 시신에 대한 반응으로 드러나는 인간 본성의 추악함은 신앙이라는 권위에 가려 진실을 말할 수 없었던 자들을 해방한다. 예수님의 죽음은 비참했고, 어떤 기적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것은 유대인이 인정한 왕으로 오신 구원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기독교인의 정의가 실현되는 방식이 아니었다. 조시마 장로의 이른 부패와 악취를 일반적인 죽음보다 좀 더 정의롭지 못한 상황으로 이해하는 알로샤의 갈등은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의심하게 되는 사건이다. 어느 순간 이 ‘최상의 정의’는 죽음 이후에 시신에서 나타날 어떤 기적 같은 현상이 되어버렸고 그 기적을 기대하게 된 것이다. 장로의 죽음은 영광스러워야 함에도 치욕으로 끝났다. 예수님의 죽음이 그러했던 것처럼.
장로를 시기하는 자는 이런 말도 했다. “단식도 엄격하게 지키지 않고, 달콤한 음식을 먹곤 했지. 차를 마실 때는 버찌 잼을 먹었는데, 그 잼에 사족을 못 써서 부인들이 보내줄 정도였어. 고행하는 수도사가 차라니, 그게 될 법한 일인가?”
지금도 어떤 죽음들 예컨대, 살이 찐 성직자들의 죽음을 보며 성도들이 내뱉는 말이다. 성직자라면 마땅히 지녀 할 이상적인 생활 습관과 외적인 모습을 성도는 기대한다. 너무 뚱뚱한 성직자는 그 모습만으로도 존경받기 힘들다. 노동자들의 피와 땀으로 얻은 소실을 성직자들이 함부로 누리면 안 되고, 이들의 고통에 참여해야 하는 까닭이다.
코로나 시대를 겪으며 목격하는 많은 죽음 속에서, 종교인들 또한 삽시간에 휩쓸려 돌아가시는 것을 보면 하느님께서 무자비한 자연의 법칙에 굴복하신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지금처럼 절실한 순간에’ 그 손가락을 감추신 것인가요? 성직자들에게만큼은 좀 더 명예로운 죽음을 주실 수 없으신 가요? 최소한 불명예와 치욕적인 죽음은 아니어야 하지 않나요?
5. 양파 한뿌리
“심술궂은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을 때 악마들은 할머니를 불바다에 던져버렸어요. 그때 수호천사가 할머니의 선행 한 가지를 하느님께 말씀드렸어요. ‘이 할머니는 텃밭에서 양파 한 뿌리를 뽑아다가 거지에게 준 적이 있습니다.’”
결국, 할머니는 혼자만 살고자 하는 욕심에 다시 지옥에 떨어지고 말았지만, 사소한 선행 하나도 하느님은 기억하고, 구원의 길을 열어준다는 이야기다.
“이분은 나를 누이로 불러줬어. 나는 절대로 잊지 않을 거야! 그런데 나는 못된 여자이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한테 양파 한 뿌리를 준 적이 있어.”
소외된 자에게 불러주는 친근한 호칭은 무엇보다 위로가 된다. 이름을 따듯하게 불러주거나, 친근한 관계를 나타내는 호칭은 어떤 선물보다 좋은 선물이 될 수 있다. 사람마다 필요한 것이 다른데 자존감이 낮은 사람의 경우에 ‘불러주는 호칭’이 의미가 있을 수 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친구’로 성도를 부르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알료샤는 ‘누이’라는 말 한마디로 그루셴카에게 양파 한 뿌리의 선행을 한 것이다.
그루셴카의 입을 통해 전달되는 ‘양파 한 뿌리’ 이야기는 아무리 악한 인간이라도 인생에서 단 하나쯤의 선행은 하며 살아간다는 것과 그것이 가느다란 구원의 실이 되고 구원받을 기회가 된다는 것이다. 이는 알료샤의 꿈속에 나타난 갈릴리의 가나 ‘혼례잔치’에서 확인된다.
“함께 즐기자꾸나. 새 포도주, 새롭고 위대한 기쁨의 포도주를 마시는 거야. 이 수많은 손님이 보이느냐?... 나는 양파 한 뿌리를 주어서 여기 있는 거란다. 여기 있는 많은 사람도 양파 한 뿌리를, 그저 자그마한 양파 한 뿌리를 주었을 뿐이지... 너도 오늘 구원을 갈구하는 여인에게 양파 한 뿌리를 주었더구나.”
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증표는, 위대하고 거룩한 희생이 아닌, 양파 한뿌리 주는 것. 이 소설을 덮으며 나는 살면서 몇 개의 양파를 나누어줬나 세어본다.
Mov Education 송병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