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사랑한다면 베르테르처럼
사랑은 아프다. 그러나 사람은 ‘사랑’을 한다. 사랑하면 사소한 순간도 충만해진다. 인생이라는 짧은 시간 속에서 영원을 느낀다. 짧지만 강렬한 첫 만남, 진정성 있는 대화, 춤추며 온몸으로 확인한 서로의 감정, 뒤이은 숫자놀이와 둘만의 시간. 그 시간 속에서 나눈 장엄한 시와 눈물. 베르테르와 로테의 감정은 시로 시작하여, 시로 끝난다. 이 두 사람의 감정은 소설적인 전개가 아니라 시를 닮았다.
소설은 어떤 스토리 전개와 예측 가능성에 대한 개연성이 있지만, 시는 함축적이고 돌발적이다. 감정은 예측 가능한 어떤 가능성이 아니고, 계획되는 것도 아니다. 돌발적이고 충동적이며, 밑도 끝도 없이 나타나 급습하고, 빼앗고, 떠나고 숨는다.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는 아토포스적 성질을 지닌다. 베르테르의 사랑이 일방적이고, 광적이고, 집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지독한 사랑에 빠져본 사람이라면 사랑의 파괴적인 속성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다. 규정될 수도 찾을 수도 없는 사랑의 아토포스적 성질 때문에 사랑에 빠지면 어느 정도의 집착은 자연스레 뒤따르게 되는 것이다.
로테는 한 남자의 ‘약혼자’이기에 베르테르와의 관계 속에는 언제나 ‘거리감’이 존재한다. 윤리와 도덕성에 의해 생겨난 이 ‘거리’는 베르테르의 용기를 꺾고, 좌절하게 하고, 비참하게 만든다. 동시에 이러한 거리 혹은 ‘사랑할 수 없음’에 대한 관념은 ‘사랑’의 전제이면서, ‘그 대상’이 익숙한 존재로 전락하는 것을 막아주는 공간이 된다. 어쩌면 로테에 대한 ‘알베르토’의 사랑이 더 열렬하지 않은 것은 약혼과 이어진 결혼으로 인한 ‘거리감의 사라짐’ 때문일 수 있다.
“저는 겁이 많은 편이지만 다른 분들에게 용기를 줄 생각에 일부러 대범한 척하다 보니 정말로 용기가 생겼어요.”
로테는 겉으로 베르테르와의 거리를 두려고 노력하지만, 너무 멀지 않은, 부르면 닿을 수 있는, 둘러보면 보이는 풍경에 그를 잡아두려 한다. 욕망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거리를 요구한다. 그러나 이성이 불타버린 베르테르의 괴로움은 깊어가고 정신은 쇠약해져 간다. 사랑의 파괴적인 속성을 느끼기 시작한다. 떠나감으로 존재를 각인시키려 한다. 그러나 돌아서기로 마음먹는 그 순간 “잘 가요, ‘사랑하는’ 베르테르!” 무엇보다 강력한 말 ‘사랑하는’으로 로테는 그를 잡아둔다. 사랑은 무기력함을 함축한다. 로테 앞의 베르테르는 무기력하다.
중학교 3학년 때 좋아하는 여자아이에게서 편지를 받은 적이 있었다. Dear라는 단어로 시작하는 그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가 누구에게든 쓰는 흔한 인사말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지만, 그때는 오직 나만을 위해 쓰는 그런 단어로 믿고 싶었다. Dear에게는 ‘사랑하는’이란 뜻만 존재하기를 바랬었다.
사랑은 다분히 인간적인 만큼 인간적인 사랑을 하라고 요즘 사람들은 말한다. 인간다운 방식으로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일도 하면서 남는 시간을 애인에게 투자하라고 한다. 데이트할 때 1/N로 계산해도 괜찮다고 한다. 계산된 사랑도 괜찮다고 한다.
그러나 베르테르는 자신을 위험에 빠뜨린다. 자신의 삶에 상징적인 질서를 폐기하며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죽음으로 삶을 긍정하고자 한다. 사랑하기 때문에 죽는 것은 극소수의 고결한 사람이나 얻는 있는 기회라고 한다. 사랑은 감정의 씨앗이다. 베르테르는 죽을 때, 로테를 처음 만날 때 입었던 그 파란색 연미복과 노란색 조끼를 입고 있었다. 파랑은 명예와 신앙을 나타낸다. 성모 마리아의 파란색 망토는 인간을 신과 연결하는 신앙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 소설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일꾼들이 운구를 맡았으며, 성직자는 한 사람도 동행하지 않았습니다.”
기존의 질서에 대한 도전이자 사랑을 위한 죽음의 증명은 아무도 인정하지 않은 채 끝났지만, 파랑에 노랑이 중첩되면 녹색이 되는 것처럼 베르테르 마음속 사랑의 씨앗은 죽어서야 나무와 숲을 이루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