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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암 칼럼]살아있는 역사 속에 잊혀진 병자호란의 300 영웅들…
기사입력 2015-06-07 15:06 | 최종수정 06-07 15:06(편집국) | 기사 : 최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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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우리가 대가 없이 누리고 있는 자유, 민주, 평화는 선조의 피땀으로 점철된 과거에 기인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에 대한 방관과 무관심 그리고 배우기를 꺼려하는 탓에 과거의 시간과 현재가 자꾸만 단절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제대로 된 역사를 알지 못하기에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는 능력도 점차 퇴화되는 모습이다. 젊은이들이 픽션을 자꾸만 논픽션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역사 단절’이 낳은 병폐현상 중 하나다.


더욱 심각한 것은 진정한 반성도 책임규명도 하지 못하는 그런 과오 메카니즘 실패에서 배우지 못하는 체질은 세월호 사고, 4.29 재보선 선거, 구한말을 연상케 하는 현재의 외교 정책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단재(丹齋) 신채호 선생의 말이 일침처럼 들려온다.

 

오늘, 살아있는 역사 속에 잊혀진 300 영웅들에 대한 후손들의 과오 매카니즘 실패의 한 사례를 소개하고 숨겨진 비사가 아닌 살아 있는 역사로 바로 세우는 초석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때는 인조14(1636) 병자1214, 임금은 창덕궁을 떠나 남한산성으로 피신한다. 종묘사직 신주와 함께 왕자와 비빈들은 강화로 피란시키고 인조도 뒤따르려 했으나 적이 이미 무악재, 양천, 김포 쪽 길을 막아 할 수 없이 남대문을 지나 송파나루를 건너서 관료 1만여명과 군사 1 2천명을 데리고 남한산성으로 피란(避亂)하였다.


​​청의 주력부대가 이틀 뒤 송파나루 삼전도 들판에 도착하며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숨통을 조이듯 서서히 좁혀 들어왔다.


성중에서는 척화와 화의 파간에 갑론을박 논의만 요란할 뿐이었고 외부와 연락이 끊긴 채 식량과 시초(柴草-)가 결핍되어 가다가 강화성의 함락 비보를 접하고 인조 15 (1637) 1 30, 성이 포위된 지 45일만에 성을 개방하고 왕은 청에게 성하지맹(城下之盟)을 맺는 치욕을 당하였다.


여기에 간과할 수 없는 작은 비사가 있었으니 살아있는 역사 속에 잊혀진 영웅 300의 남한산성 법화골 전투이다.

 

1637(정축년) 1 28일 술사가(도술에 능한, 책사) 말하기를 “오늘은 화친과 싸움이 모두 길하다” 하니 김유()가 이 말을 믿고 한편으로는 화의를 청하며 또 한편으로는 접전을 벌이자고 하였다.


이에 나만갑이(종사관으로 5품관) 박황에게 말하기를 “싸움을 하려거든 싸움을 하고 화친을 하려거든 화친을 할 것이지 하루 동안에 어떻게 화친과 싸움을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마치 노래 부르며 곡하는 일을 한 번에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하였다.


이날 날씨가 조금 풀려 군사들의 얼굴에 핏기가 돌고 화기가 있었다. 김유가 네 성의 장수들을(,,,북문의 장수들) 불렀다. “북성 아래 적진이 매우 허술하니 각각 정예병을 내어 이를 무찌르도록 하라” 하니 네 성의 장수들이 좋지 않은 계책이라 극구 말하였으나 김유는 듣지 않고 직접 장졸을 거느리고 북문으로 나가 문루에 좌정하고 대장의 깃발과 북을 세워 위엄을 갖추고 군을 지휘하여 독전하였다..


총수(총을 쏘는 군사) 300여명이 북문을 나서 산 기슭을 따라 내려가니, 성 아래 계곡이 굽이 돌은 곳에 오랑캐 기병들이 곳곳에 매복하여 있었다. 적병은 5군데에서 나와 –주둔지에서 나와- 고읍(현재 고골)쪽으로 내려가 대기하며 포로와 주민 몇몇 그리고 소, 말들을 풀어 놓고 우리 군사를 유인 하였다. 김유가 깃발을 휘두르며 진군하기를 명하였으나 우리 군사는 산을 내려가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김유가 비장 유호(柳瑚)로 하여금 진군하지 않는 자를 목을 베개 하자 유호는 군졸들을 만나는 대로 칼로 찍어 넘겼다. 그때서야 어영군(군대, 지금의 연대급 정도) 300여명이 산을 내려가 포로들과 버려둔 소, 말을 취하였는데 적병은 못 본 척하였다.


우리 군사가 소나무 송책(울타리)을 넘어 진군하나 거느리는 장수가 없어 대오가 헝클어지고 진형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적군들도 백병전을 치르듯 싸움이 시작되었다. 김유는 화약을 아끼기 위해 총을 쏘는 사람에게만 화약을 지급하게 하여 한발을 쏜 병사들이 화약을 달라는 소리가 싸우는 소리와 함께 골짜기를 메아리 쳤다.


오랑캐가 비로소 숨어있다가 말을 채찍질하며 일제히 역습을 감행 하였다. 적들의 말은 나는 것처럼 빨랐고 사방에서 복병이 기습적으로 달려드니 우리 군사는 총 한 발, 화살 한발을 쏠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섬멸 되었다. 단 한 사람도 돌아오지 못하고 전멸 되었다.


별장 신성립(申誠立), 지여해(池學海), 이원길(李元吉) 등 중견 지휘관 8명을 비롯하여 300명 이상이 전사했다. 오랑캐 군사는 죽은 자가 겨우 두 명뿐이었다. 처음에 누군가 말하기를 “소나무 성책을 불사르면 우리 군사가 진군하는데 거칠 것이 없을 것이다” 하여 김유가 명하여 불사르게 하였는데 적군이 우리에게 진격하는데 가릴 것이 없으니 적군에게 더 유리하게 되었다. 산비탈이 험준하여 뒤돌아 서기가 어렵고 깃발을 휘둘러 퇴각을 명하였으나 성과 거리가 멀어 보이지도 않아 모조리 섬멸되었다.


유호는 전사자가 40명 정도라고 축소하여 보고했다. 유호가 퇴군시키지 못했다는 죄를 초관(100명의 군사를 거느리는 무관, 중대장)에게 씌우고 초관의 목을 베니 사람들이 모두 원통해 하였다. 김유는 스스로 싸우다가 스스로 패배하고는 허물을 돌릴 곳이 없게 되자, 북성장(북쪽 성을 지키는 장군) 원두표가 병사들을 퇴각시키지 못하고 구하지 못하였다고 핑계하여 극형에 처하려 하자 좌상 홍서봉이 이르기를 “수장이 일을 저질러놓고 부장에게 죄를 돌려서야 되겠는가?”하였다. 할 수 없이 김유는 왕의 처서에 엎드려 대죄하고 처벌을 기다리며 원두표의 종군은 곤장을 때리며 매질로 거의 죽게 만들었다.


[출처 : 남한지]

 

가뜩이나 정예병이 부족한 산성의 현실에서 이들의 죽음은 너무 큰 손실이었다. 즉흥적이고 섣부른 작전이 부른 비극이었다. 그러나 패전의 진상 파악과 책임자에 대한 처벌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군병들의 생명보다 자신의 공이 더 중요했던 영의정 김유의 앞뒤 없는 욕심에 밀려 성 밖으로 나섰던 군병들은 청나라 군의 그 뻔한 매복에 걸려 차가운 눈 위에서 숨져가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병사들을 사지로 내몰았던 김유는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호란 이후인 1644년에 두 번째로 영의정 자리에 올랐다.


이후 조선에서 가장 먼저 최전선으로 나가 싸우고 최종 책임을 스스로 지는 실천적 리더십은 자취를 감췄다.

 

병자호란이 끝난 후 임진왜란 때의 공신이나 순절한 장병 등은 나라에서 벼슬과 정려 등으로 그 공을 기렸으나 정묘·병자호란 등 청()나라에 대항하여 순절한 선열에 대해서는 전란 후 청나라의 눈치를 보느라 제대로 공을 기리지 못했다.

그 이후 법화골 전투에서 희생된 정예병 300명의 고귀한 죽음과 구천을 떠도는 그들의 원령을

달래는 진혼제나 위령비 건립 같은 것은 생각할 기력조차 없었고 세월이 흐름에 따라 세인들의

기억에서도 망각되고 말았다.

 

유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호국정신(護國精神)이란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나 자신을 희생하는 충성심을 말한다. 선열들의 거룩한 희생으로 지금의 대한민국이 존재함을 자라나는 후손들에게 알리고 호국영령들의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서라도 작은 비라도 세워 300 영웅의 넋을 위로하는 것이 후손된 도리이자 의무이다.


그러나 법화골과 관계되는 광주시와 하남시는 이런 사실을 알까?. 300 영웅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한 ‘병자호란 충혼비’를 세워 줄 생각이나 해 봤을까? 인구가 급증하고 있지만 자라나는 자녀들에게 절대 필요한 향토사와 존경 받을 수 있는 역사인물에 대한 발굴과 보존 및 선양사업에는 너무 소홀하다는 지적이 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남한산성의 새로운 스토리텔링 문화 컨텐츠와 관광자원이라는 값진 선조들의 선물만을 받아 놓고 ‘문화가 역사’라는 본연의 사업을 망각하고 관심도 뜻도 없는 것 같다. 아니! 몰라서 그러는지 능력이 없어 그러는지 모르겠다.


단지 비용이라는 금전적 값어치로만 인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자유와 번영이라는 열매에 대해 그저 즐길 것이 아니라 우리민족이 치열하게 살아온 삶 전체에 대해 감사하며, 애국선열들의 삶이 결코 헛되지 않도록 그 의미를 되짚어 보는 시간을 우리 스스로가 먼저 가져보도록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 후손들은 조국을 위해 죽은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에 대한 예의가 너무나 소홀하지는 않았는지 깊게 반성도 해 봐야 할 것이다.

 

 

江巖 崔悳坤

전 하남시 초대 부시장

전 경기도문화예술회관 초대관장

대한민국미술대상전 추천작가

대한민국미술대상전 초대작가

대한민국미술대상전 심사위원 자격 취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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