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길을 함께 걸으니 들을 수 있었고 볼 수 있었습니다
청소년의 집 아이들은 성취 경험의 부족으로 자존감이 높지 않은 아이들이 대부분입니다. 편부모, 조손가정 등 다른 친구들과는 다른 가정환경에서 자랄 수밖에 없었던 그 청소년들에게 사회는 ‘의지와 노력으로 스스로 일어나야 하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과연 그런가요?
아이들에게 스스로 무엇인가를 해냈다는 자신감과 성취감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닫힌 가슴을 열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공유해야 했습니다. 무엇을 해야 하나.
당시 대학생들의 국토 대장정이라는 걷기 프로젝트에 착안한 저는 조금은 힘들어 보이겠지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고자 ‘나를 극복하기’ 국토순례 대장정 프로젝트를 추진했습니다.
도전하고 싶었습니다. 이 아이들과 함께라면 저도 해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드디어 2009년 5월 19일. 서울에서 강원도 춘천까지 총 100km, 2박 3일의 대장정을 시작하게 됐고 그 후로 매년 5회에 걸쳐 걸으며 아이들의 마음을 담았습니다.
한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을 경찰차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그 아이와 저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 아이들이 살아온 이야기... “많이 힘들었겠구나, 그래. 그래. 그래…” 제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아이를 힘껏 안으며 저도…
·19세 청소년, 공단 제1호 창업지원 대상자로 선정되다
그 아이들 중 유난히 눈에 띄는 아이가 하나 있었습니다. 늘 과묵하고 얼굴에는 어딘가 불만이 있어 보이는 한 키 큰 여드름 투성이 배현수. 청소년의 집에서 속내를 보이지 않던 그 아이도 함께 걸으며 이런저런 말을 걸어보니 어느샌가 제게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가정의 경제적 어려움으로 어머니의 가출, 사채업자의 행패, 동생의 가출 등 그 숨 막히던 시절.
그러나 그 아이는 대입검정고시를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고, 그 무렵 공단은 창업지원 사업을 최초로 시작하게 돼 그 지원대상자로 저는 배현수를 제1호 창업지원 대상자로 추천해 2009년 6월 24일 드디어 3800만원의 임차보증금을 지원받아 ‘우리 농산물’이라는 상호로 창업을 하게 됐습니다.
장사 수완이 남달랐던 그는 너무나도 열심히 했고 하루 매출이 2∼300만원이 넘어서자 하루에 잠을 한 두 시간 자는 무리수를 두기 시작했고, 그러면 안 된다고 여러 번 충고를 했음에도 성공을 위해 이 정도는 이겨낼 수 있다며 고집을 부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4시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불안했습니다. 역시나 현수였습니다. “보호자를 오라고 하는데 생각나는 사람이 소장님밖에 없었습니다.” 병원이라고 했습니다. 새벽에 가락동으로 물건을 가지러 가던 중 졸음운전으로 서울 외곽순환도로 가로등을 들이 받아 사고로 고려대학교 안암병원 응급실에 있다고 했습니다. 병원으로 달려가는 차 안 뉴스에서도 현수의 교통사고가 안내되고 있었습니다. 병원 응급실에 도착하니 한쪽 구석 침대에 현수가 병원 하얀 가운을 덮고 누워있었습니다. 가운을 들추니 손가방 하나를 가슴에 안고 눈을 뜨는데 가방을 잡아당기자 빼앗기지 않으려 하다 “소장님”하며 가방을 내주었습니다.
여기저기 살펴보니 큰 부상은 없어 보였으나 많이 놀라있었고 가방을 내준 뒤 현수는 깊은 잠을 자기 시작했습니다.
손가방을 열어보니 주문한 채소(호박, 감자, 오이, 배추, 무, 고추 등) 목록과 현금 800만원이 들어있었습니다.
·작은 아버지라 부르겠습니다.
지금은 아내와 함께 호주에서 용접공으로 살고 있는 배현수는 2년여 후 귀국을 한다고 합니다. 이런저런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던 그 아이가 제게 이런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총장님은 그때 현직에 안계시면 작은 아버지라고 호칭 바꾸겠습니다.”
“그래, 고맙다. 우리 인연 하늘에 닿을 때까지 이어가 보자꾸나…”
[서울 : 한국법무보호벅지공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