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리’의 인문 에세이
거침없이 놀아보기_장자의 소요유
매주 금요일을 ‘낯선 도시로 떠나는’ 셀프 휴일로 지정한 후 내 지식과 삶에 조금씩 변화가 시작된 것 같다. ‘나만의 휴일’인 금요일에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도시로 떠난다. 미리 검색해보지 않는다. 그 도시에서 어디로 갈지 정하지 않는다. 무엇을 먹을지 정하지 않는다. 얼마나 머물지도 정하지 않는다. 작은 도시에 들어서면, 주로 이정표를 유심히 보게 되는데, 작은 시골에도 꼭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 한둘은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동네 출신의 역사적인 인물이 살았던 생가, 혹은 기념관이 있으면 꼭 찾아가는데, 그곳에서의 마주침은 대게 내 삶을 좀 더 풍요롭게 해주었다.
충청북도에 증평이라는 작은 도시가 있다. 이곳은 조선 최고의 독서왕 김득신이 난 곳이다. 시장을 둘러보고 동네를 거닐다 김득신 기념관을 마주치게 되었다. 마누라가 죽었는데도 옆에서 책만 읽고 있었던 김득신, 죽음 앞에서 곡하지 않고 평소처럼 책을 읽어나간 그를 보면서, 나는 그를 좋아하게 된 것 같다.
출세를 위해 읽은 것도 아니요, 명예를 위해 읽은 것도 아니다. 독서가 그냥 삶이다. 그날 이후 나는 여행의 ‘컨셉’을 조금 바꾸어 낯선 여행지에 가서 독서를 한다. 30분 정도 차분하게 책을 읽다 보면, 고민이 사라진다. 특히 ‘오쇼’의 도덕경 강해 ‘두드리지 마라. 문은 열려 있다.’는 조금씩이라도 꼭 읽는데, 집에서 읽으면 이해되지 않는 내용이 낯선 곳에서는 이해되는 신비로운 체험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나에게 여행은 생각의 산파다.
남들이 일하는 금요일에 여행하다 보면 나만 논다는 생각에 즐거울 때가 있다. 그리고 이렇게 낯선 풍경과 사람들이 내 눈에 들어오면 새로운 아이디어가 생겨 일에 도움이 될 때가 많아서 이런 나만의 놀이가 일과 중첩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놀고 있지만, 동시에 일하는 것이 된다.
금요일에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는 언제나 어딘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열심히 노력한 결과 내가 도달한 곳은 의도한 그곳이 아니었다. 대학 입학할 때 마음속에 그렸던 여자친구의 모습도 그랬고, 졸업 후 첫발을 내디뎠던 직장도 처음부터 꿈꾸었던 그곳이 아니었다. 살면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갈구했지만, 언제나 손에 들려있는 건 다른 것이었다.
내가 마음속으로 상상하는 그것 혹은 그곳이 언제나 제일 좋은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이유로든 떠밀려 정착한 다른 목적지들은 대체로 좀 더 나은 선택지이거나 또 다른 가능성을 내포한 것들이었다.
내가 원하는 바가 이루어졌더라면 더 끔찍했을 결과들도 더러 있었다. 겉에서 보기만 하거나 겪어보기 전에 아름다워 보이는 것 중, 노력과 인내심이 없이 그 아름다움이 유지되기 어려운 것들이 많다. 직장생활이 그렇고 결혼생활이 그럴 것이다. 아이의 탄생이 그렇고 육아가 그렇다. 간절히 열망하는 일들이 있다. 이루어지는 순간 또 다른 일들이 펼쳐진다. 끝과 시작은 맞닿아 있다. 아름다운 꽃을 감상하는 일은 쉬우나, 키우는 과정은 어렵다.
멀리 소풍가서 논다는 장자의 ‘소(逍)요(遙)유(遊)’ 가르침을 나는 좋아한다. 거침없이 놀면서 살기로 다짐한다. 멀리 떠날수록 흐트러지는 자신을 본다. 공간적인 멀어짐은 자유를 준다. 한국을 떠나 낯선 나라, 몽골, 브루나이, 다바오, 뉴칼레도니아 등 나를 찾는 이가 없는 곳에 있었을 때 더 자유를 느꼈다. 혼자서 술을 마셔도 즐거운 내가 있었다.
열심히 살아도 내가 원하는 곳에 도달하진 않는다. 그럼 차라리 제대로 놀면서 사는 것이 후회 없겠다. 노력보다는 우연성이 더 삶을 이끄는 것 같다. 노력한 자가 운 좋은 사람을 이기기 힘든 이유다. 나는 좀 더 재미있게 놀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대학원에 왔다. 많은 책을 읽는 것도 좋은 놀이가 된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 틈에 있다 보면 같이 즐겁게 놀 수 있는 친구도 만나게 될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나는 3교시가 좋다.
이렇게 놀다 보면 어쩌면 훨씬 더 멋진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장자는 나에게 놀라고 한다. 소요유(逍遙遊) 속에 들어있는 공통된 단어 착(辵)은 ‘쉬엄쉬엄 걷다, 달리다, 뛰어 넘는다.’는 뜻이다. “때론 천천히, 때론 빨리, 그리고 거침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