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수사반장, 국민의 아버지… 한 시대의 따뜻한 어른이 별이 되다”
어느 날 문득, 익숙한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우리는 비로소 깨닫는다. 그 사람이 얼마나 오랫동안 우리 삶의 한 부분이었는지를.
2026년 10월 29일 밤, 대한민국의 국민배우 최불암 선생이 향년 87세를 일기로 우리 곁을 떠났다.
참으로 먹먹한 소식이다.
그는 우리의 가족도, 이웃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의 부고는 오래전 아버지를 떠나보냈던 날처럼 가슴 한구석을 저리게 한다.
어쩌면 우리는 그를 배우가 아닌, 우리 시대의 아버지로 기억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얼굴에는 세월이 있었고, 그의 목소리에는 삶이 있었으며, 그의 눈빛에는 사람을 향한 따뜻한 사랑이 있었다.
드라마 '수사반장'에서 그는 정의로운 형사 박영한으로 살아왔다. 불의 앞에서는 단호했지만 약한 사람 앞에서는 누구보다 따뜻했던 사람. 권위보다 양심을, 힘보다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전원일기'에서는 또 다른 아버지였다.
고단한 농촌의 삶 속에서 가족을 지키고, 말없이 자식들의 삶을 바라보던 김 회장. 때로는 엄격했고 때로는 무뚝뚝했지만, 그 깊은 침묵 속에는 가족을 향한 사랑이 있었다.
우리의 아버지들이 그랬다.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쉽게 하지 못하면서도 자식들의 앞날을 걱정했고, 자신의 아픔은 감춘 채 가족의 행복을 위해 평생을 살아갔다.
최불암이라는 배우가 특별했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연기를 통해 우리 아버지들의 삶을 대신 이야기했고, 우리가 미처 표현하지 못한 가족의 사랑을 화면 속에 담아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한국인의 밥상'에서 다시 만난 그는 여전히 따뜻했다.
화려한 식탁보다 소박한 밥상을 찾았고, 이름 없는 이웃들의 인생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한 그릇의 밥 속에 담긴 어머니의 희생을, 고향의 그리움을, 평범한 사람들의 눈물과 웃음을 전했다.
그에게 밥상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었다. 우리가 살아온 역사였고, 가족이었으며,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사랑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는 평생 사람을 이야기한 배우였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보다 평범한 사람의 삶을 비추었고, 화려한 성공보다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의 가치를 보여주었다.
우리가 그를 국민배우라 불렀던 것은 단지 유명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의 연기 속에서 우리의 부모를 보았고, 우리의 고향을 보았으며, 우리 자신의 인생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너무도 빠르게 살아간다.
사람보다 성과가 앞서고, 진심보다 계산이 먼저이며, 따뜻한 말 한마디를 나눌 여유조차 잃어가고 있다.
그런 시대이기에 최불암이라는 이름은 더욱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그는 우리에게 묻는 것 같다.
우리는 과연 얼마나 따뜻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누군가의 아픔을 진심으로 헤아린 적이 있는가.
가족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건넨 날은 언제인가.
그가 남긴 것은 수많은 작품만이 아니다.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좋은 어른으로 나이 들어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깊은 울림이다.
인생은 누구에게나 마지막 장면이 찾아온다.
아무리 화려한 삶도 언젠가는 막을 내리고, 아무리 큰 박수를 받던 사람도 결국 세상과 작별한다.
그러나 사람의 진정한 가치는 생의 마지막 순간이 아니라, 떠난 뒤에도 얼마나 오랫동안 누군가의 가슴속에 살아 있는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불암 선생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가 남긴 따뜻한 미소는 오래된 텔레비전 화면 속에 남아 있을 것이고, 깊고 정겨운 목소리는 우리의 기억 속에서 다시 울려 퍼질 것이다.
언젠가 우리도 나이가 들어 삶의 끝자락에 서게 될 것이다.
그때 누군가가 우리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해준다면 얼마나 행복한 인생이겠는가.
"참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있어 참 좋았다."
최불암 선생의 삶이 우리에게 남기는 마지막 가르침은 어쩌면 그것일지도 모른다.
사람은 이름을 남기기보다 온기를 남겨야 한다는 것.
성공한 인생보다 누군가에게 그리운 사람으로 기억되는 인생이 더 아름답다는 것.
오늘 대한민국은 한 명의 위대한 배우를 떠나보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배웅하는 것은 단순히 한 배우의 87년 인생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아버지가 살아온 세월이고, 어머니가 지켜온 밥상이며, 우리가 함께 웃고 울었던 한 시대의 추억이다.
최불암 선생님.
오랜 세월 우리 곁에서 아버지가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힘겨운 날에도 웃음을 잃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무거웠던 세월의 짐을 내려놓으시고 편히 쉬십시오.
당신은 떠났지만, 당신이 남긴 따뜻한 세상은 우리 곁에 오래도록 머물 것입니다.
한 시대의 아버지는 떠났지만, 그 아버지가 남긴 사랑은 결코 떠나지 않습니다.
2026년 가을, 대한민국은 또 한 분의 따뜻한 어른을 가슴에 묻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명기 | 한국미디어일보 논설위원
2026년 10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