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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칼럼) 파리대왕 그리고 악의 평범성에 대하여

편집국 | 승인 24-08-22 18:42 | 최종수정 24-08-23 21:03(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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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대왕이란 이름은 책이 되었건, 영화가 되었건 그 내용을 짐작하기 힘든 모호성을 띠지만, 썩 긍정적인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 스케일의 법칙에 따라 파리의 크기를 독수리처럼 키워보면 섬뜩할 정도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사탄의 모습을 닮았다. 그리고 파리가 꼬이는 시체나 오물은 악의 근처에 머무는 어떤 존재 혹은 죽음을 연상시킨다.

비행기 사고로 인한 조난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대체로 소수의 인원이 고립된 섬에서 생존하는 방식을 터득해가는 이야기로 전개된다. 고립된 상황에서 의지하며 어린 남녀가 성장해가는 「블루라군」이 그랬고, 혼자서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게 고독을 이겨나간 「캐스트 어웨이」가 그랬다. 그러나 이 영화 ‘파리 대왕’은 살아남기 위해, 순수함을 상징하는 아이들조차 얼마나 잔인하게 변해 갈 수 있는지를 그려간다. 처음에는 조난된 아이들의 모습은 절망적이지 않다. 오히려 즐거워 보이기까지 한다. ‘소라’로 질서를 잡아가는 모습은 일견 어른스러워 보이지만, 멧돼지 사냥과 손에 피를 묻히는 경험은 아이들 깊이 내재한 폭력성을 서서히 끄집어내기 시작한다. 

‘불을 지키는 것’만 유일한 희망으로 여기는 랠프의 ‘이상’은 당장 배고픈 아이들을 앞에 놓인 ‘멧돼지 고기’ 앞에서 힘을 잃어간다. 어떤 이상적인 구원도 배고픈 군중들 앞에서는 의미 없는 것이다. 절차적 정당성만으로 ‘대장’임을 주장하는 랠프의 외침은 힘이 없다.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만 자꾸 강요하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이 된다. ‘질서가 중요하다.’라는 외침이 폭력적일 수 있다. 질서를 가장한 명령은 아이들을 점점 더 반항적이고 폭력적으로 만들었다. 배고픔을 해결하지 못하는 권위는 힘이 없고 고장 난 질서만 양산한다. 이에 대항하는 잭의 편 가르기는 일견 정치적으로 보이지만, 정치야말로 다양한 의견을 먹고 자라는 생명체다. 

문제는 이 다양성이라는 낭만적인 단어는 언제나 많은 갈등을 내재한다는 것이다. 각자가 자기의 역할을 잘 찾아가면 쉽게 해결될 일들이지만, 고립된 섬에서 생존을 위한 자기 역할 찾기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나이가 다르고 힘도 다르다. 개미만 있는 사회가 건강한가, 개미와 베짱이가 함께 사는 사회가 건강한가? 쌍둥이 형제가 한 명의 역할만 할 때 아이들의 시선은 곱지 않다. 놀고만 있는 아이들을 두고 보지 못한다. 이어 성숙하지 못한 지시가 뒤따른다. 

배고픔을 위한 사냥이 있고, 놀이를 위한 사냥이 있다. 배고픔을 위해 시작된 아이들의 사냥은 이내 놀이로 옮겨간다. 멧돼지의 죽음 이후에 멧돼지를 향한 더 큰 폭력이 자행된다. 한 번 발현된 폭력성은 현실 세계의 놀이로 옮겨지고, 멧돼지 살해와 사이먼을 죽인 사건은 무관하지 않다. 어린아이들은 사냥과 놀이,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다. 흉측한 몰골의 얼굴을 한 아이들의 죄책감은 사라진 상태다. 

이 영화는 언뜻 아이들에게 내재한 야만성을 폭로하는 것 같지만, 이 아이들이 따르는 어른의 세계 혹은 어른들이 이룬 문명은 더 폭력적임을 또한 폭로한다. ‘구조를 위해 피웠던 불’은 분명 다시 문명 세계로 돌아갈 가능성이었지만, 그 구원의 불에 대한 소홀한 관리는 현실을 다 집어삼키는 괴물이 되기도 한다. 이 ‘봉화’의 문제는 영화 끝까지 갈등의 한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다. ‘돼지’로만 명명되는 안경 쓴 아이를 통해 집단은 ‘불’을 얻지만, ‘불’을 훔쳐 인간에게 선물로 준 프로메테우스가 매일 독수리에 간을 파먹히는 고통을 당한 것처럼, ‘새끼돼지’는 언어폭력 때론 신체폭력으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결국은 죽음을 맞는다. 죽음을 맞기 전 ‘돼지’는 묻는다.

  “우리는 어른들처럼 했는데 왜 실패했을까?”

봉화를 산에서 해변으로 내리자고 제의할 만큼 ‘지적 과감성’이 있었던 ‘돼지’의 죽음은 또 다른 ‘악의 평범성’에 대한 경고다. 어떤 아이도 ‘악’한 행위를 할 수 있다. 얼굴에 피와 흙을 칠한 아이들의 순수한 자아는 ‘가면’ 뒤에 숨었다. 폭력적인 리더 뒤에 숨은 아이들은 행위의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없는 ‘사유 불가능’한 상태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에서 ‘홀로코스트’의 시작을 보았다. 그리고 비참하게 죽은 ‘돼지’에게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어른들처럼 했기 때문에 실패한 거야.”





송병민(minaryhouse@gmail.com)
 
약력
모브 입시컨설팅 그룹 대표
TEPS, TOEIC 등 영어책 4권 출간
모비딕 인문학, 영어 자료실 대표
모브 델리85 대표
(주)유어프렌즈 MICE 전문 여행사 이사
(주)디자인본어비디자인 그룹 CFO

학력
고려대 불어불문학과 학사
연세대 공학대학원 석사
서울대 사범대학원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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