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예방접종사업(NIP) 입찰 과정에서 들러리를 세워 가격을 담합했다는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주요 제약사와 유통업체들이 대법원에서 최종 무죄를 확정받았다. 2026년 1월 7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2부(주심 오경미 대법관)는 공정거래법 위반 및 입찰방해 혐의로 기소된 녹십자, 유한양행, 보령바이오파마, SK디스커버리, 광동제약,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 등 6개 법인과 관련 임직원 7명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원심판결을 확정했다. 이번 판결은 백신 시장의 특수한 공급 구조와 방역 당국의 긴급한 수급 상황을 사법부가 전향적으로 인정한 결과로 풀이된다.
해당 업체들은 지난 2016년부터 2019년까지 조달청이 발주한 자궁경부암 백신 등 국가예방접종사업 입찰에 참여하면서, 특정 업체를 낙찰자로 정해두고 나머지 업체들이 들러리로 참여하게 함으로써 공정한 경쟁을 방해하고 폭리를 취한 혐의로 2020년 기소되었다. 1심 재판부는 이들의 행위가 자유경쟁 원칙을 훼손했다고 판단해 법인과 임원들에게 각각 벌금형을 선고했으나, 2심에서 판결이 완전히 뒤집혔다.
항소심 재판부는 백신 입찰 시장이 일반적인 경쟁 입찰과는 다른 "구조적 특수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재판부는 "다국적 제약사가 제조한 백신을 국내 공동판매사가 독점적으로 유통하는 구조상, 다른 유통업체들이 제조사의 공급확약서를 받아 실질적인 경쟁을 벌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환경이었다"고 분석했다. 즉, 공정한 자유경쟁을 통해 적정 가격이 형성될 것이라는 전제 자체가 성립하기 어려운 시장이었다는 설명이다.
특히 법원은 이른바 "들러리 세우기" 행위가 부당한 이득을 취하기 위한 목적이라기보다, 국가 방역 체계의 안정을 위한 조치였다는 점을 인정했다. 당시 질병관리본부 등 방역 당국은 백신의 적기 공급을 강하게 압박하고 있었으며, 유찰이 반복될 경우 예방접종 차질이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의 행위는 입찰 절차를 신속히 마무리해 백신을 적시에 공급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뿐, 경쟁을 제한하거나 가격에 인위적인 영향을 미치려 한 고의가 증명되지 않았다"고 판시했다.
또한 2심 재판부는 방역 당국 실무자들 역시 실질적인 경쟁이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으며, 수의계약을 통해서라도 신속한 물량 확보를 원했다는 점을 무죄 근거로 삼았다. 검찰은 이러한 2심 판결에 불복해 상고했으나, 대법원은 "원심 판결에 공정거래법 및 입찰방해죄에 관한 법리를 오해한 잘못이 없다"며 상고를 기각하고 무죄를 최종 확정했다.
이번 대법원 판결은 제약업계에 큰 파장을 불러올 것으로 보인다. 업계 관계자들은 그동안 백신 공급망의 특수성을 무시한 채 진행되었던 검찰과 공정거래위원회의 잣대에 경종을 울린 판결이라며 환영하는 분위기다. 반면, 이번 형사 재판 무죄 확정이 공정위가 이미 부과한 수백억 원대 과징금 처분에 대한 행정소송 결과에도 영향을 미칠지 귀추가 주목된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형사상 무죄와 행정상 담합 판단은 별개일 수 있다는 시각도 존재하나, 사법부가 시장의 특수성을 공식 인정한 만큼 제약사들의 구제 가능성도 열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