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진의 과실이 있더라도 환자 본인의 잘못으로 인해 발생한 추가 치료비에 대해서는 병원 측이 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법원 판단이 나왔다. 이는 의료 사고 발생 시 병원 측의 치료비 청구를 엄격히 제한해 온 기존 대법원 판례의 적용 범위를 환자의 귀책 사유가 명확한 영역까지 세분화하여 병원 부담을 완화한 판결이다.
서울고등법원 제9민사부는 조현병 환자 A씨가 입원 중 자살 시도로 중상을 입은 사건의 항소심에서 병원의 상계항변을 일부 인용했다. 재판부는 병원 측에 위자료를 포함해 총 3억 7,752만 7,002원과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선고하면서도, 전체 손해액 중 환자 책임으로 돌아가는 부분의 치료비는 병원이 청구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사건은 지난 2019년 12월 조현병 증세로 B 대학병원에 자의입원한 A씨가 산책 도중 자살을 시도하면서 시작됐다. 이 사고로 A씨는 지주막하출혈과 척수 손상 등 중증 상해를 입었으며, 병원의 감시 소홀을 이유로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1심 재판부는 병원 책임을 손해액의 25%로 제한하고 3억 9,050만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으나 양측 모두 이에 불복해 항소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환자의 비협조적인 태도를 주요 판단 근거로 삼았다. A씨는 입원 후 의료진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치료제인 클로자핀 복용을 거부하다 사고 발생 이틀 전에서야 복용을 시작했다. 재판부는 치료를 성실히 따랐다면 자살 충동이 억제됐을 가능성이 컸다는 점을 지적하며, 책임 분별 능력이 있는 상태에서 스스로 자살을 시도한 환자의 잘못을 명확히 했다.
이번 판결의 핵심은 전체 손해를 세 가지 영역으로 구분한 점에 있다. 재판부는 손해를 병원 과실 영역(25%), 환자 귀책 영역(37.5%), 양측 모두의 책임이 아닌 영역(37.5%)으로 나눴다. 이 중 환자 귀책 영역에서 발생한 치료비는 병원이 청구할 수 있는 진료채무의 영역이지, 병원이 배상해야 할 손해의 일환이 아니라고 규정했다.
기존 대법원 판례는 의료진의 주의의무 위반으로 환자의 신체 기능이 회복 불가능하게 손상된 경우, 이후의 치료를 손해배상의 연장선으로 보아 병원의 치료비 청구를 금지해 왔다. 하지만 이번 재판부는 환자 잘못으로 인한 후유증까지 병원이 배상할 근거가 없다고 판단했다. 환자가 다른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경우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점과의 형평성도 고려됐다.
법원은 의료진에게 중대한 과실이 없는 상태에서 환자의 잘못으로 생긴 부분까지 병원이 감당하게 할 경우, 정책적·법리적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번 판결로 인해 의료진의 과실과 환자의 귀책이 혼재된 의료 분쟁에서 치료비 정산 방식을 둘러싼 논의는 구체화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 판결로 환자 귀책 사유에 따른 치료비 부담 주체를 명확히 가리는 기준이 제시됨에 따라, 향후 유사한 의료 과실 소송에서 책임 제한 비율뿐만 아니라 실제 집행된 치료비의 성격을 규명하는 절차는 더욱 정교해질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