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이 한반도 전쟁을 종식하고 평화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남북한과 미국·중국 등 관련국이 참여하는 당사자 간 대화를 제안했다.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 고도화를 우선 중단시키고, 중기적으로 감축한 뒤 장기적으로 핵 없는 한반도로 나아가는 단계적 비핵화 구상도 제시했다.
이 대통령은 22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제81차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한반도 평화 체제는 오랜 기간 남북은 물론 미국, 중국 등 관련국들도 그 필요성에 대해 함께 공감하고 논의해 온 핵심 과제”라고 밝혔다.
이어 “가장 핵심적인 과제는 한반도의 오래된 전쟁을 종식하고 평화 체제를 구축하는 일”이라며 “북미 대화가 조속히 재개되고 한반도 전쟁 종식과 평화 체제 전환을 위한 당사자 간 대화로 발전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 대해서는 “다행히 최근 트럼프 대통령의 결단으로 변화의 가능성이 어렵게 만들어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북미 간 대화 재개 가능성이 제기되는 상황에서 한국이 한반도 평화 논의의 당사자이자 조정자 역할을 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이 대통령은 한반도 평화 체제 구축을 위한 대화가 남북과 북미 관계 정상화에 그치지 않고 다자 협력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당사자 간 관계 정상화뿐만 아니라 다자협력을 통한 공동 성장, 동북아의 안정과 협력을 촉진하는 매우 유용한 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단계적 비핵화 구상도 공개했다. 이 대통령은 “우선 북측의 핵·미사일 능력 고도화를 중단시키고 중기적으로 축소를 거쳐 장기적으로 핵 없는 한반도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북한의 핵 능력을 단번에 폐기하는 방식보다 핵·미사일 능력의 추가 확대를 막고, 이후 감축과 폐기로 이어지는 단계적 접근을 제시한 것이다. 구체적인 실행 방법과 북한의 참여를 이끌어낼 유인책은 향후 과제로 남았다.
이 대통령은 유엔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역할도 주문했다.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한 지 35년이 지난 만큼, 당시 한반도 평화공존의 계기를 마련했던 유엔이 다시 책임 있고 건설적인 역할을 해달라는 취지다.
그는 “대한민국은 한반도 평화의 당사자이자 페이스메이커로서 대화의 길을 열고 또 이어가기 위해 온 힘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반도 평화공존을 위한 세 가지 청사진도 제시했다. 남북이 서로의 체제를 존중하고 차이를 인정하는 ‘포용적 평화공존’, 소통 채널을 복원하고 위기 방지 장치를 마련하는 ‘안정적 평화공존’, 동북아 안정과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책임 있는 평화공존’이다.
국제 정세에 대해서는 우크라이나와 중동 등 세계 곳곳에서 이어지는 무력 분쟁을 언급했다. 이 대통령은 “세계 곳곳의 무력 분쟁이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며 “드론을 비롯한 신기술이 전쟁의 양상을 빠르게 바꾸며 인권과 국제법 질서에 심각한 도전을 제기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어 “위기가 깊으면 깊을수록 유엔의 기본 정신으로 반드시 되돌아가야 한다”며 국제법과 다자주의에 기반한 국제질서 회복을 강조했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와 관련해서는 상선과 선원의 안전을 위협하는 행위를 강하게 비판했다. 이 대통령은 “최근 호르무즈와 홍해에서 반복된 해상 봉쇄는 에너지와 물류의 핵심 통로가 무기화될 때 세계인들의 일상이 얼마나 큰 충격을 받을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고 말했다.
이어 “상선을 공격하고 선원들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는 행위는 어떤 이유에서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중동 해상 분쟁이 에너지 공급과 국제 물류, 세계 경제와 민생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항행의 자유와 민간인 보호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의미다.
이 대통령은 국제에너지기구 등 기존 협력 체계를 활용해 에너지 공급망 협력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특정 지역의 분쟁이나 해상 봉쇄가 세계 경제 위기로 번지지 않도록 에너지 공급망 안정에 기여할 수 있는 국가들이 먼저 협력하는 ‘건설적 기여국 연대’도 제안했다.
기술과 기후, 에너지 분야의 국제 협력 구상으로는 ‘K-이니셔티브’ 세 가지 비전을 제시했다. 기술 발전의 혜택을 모두가 누리는 ‘글로벌 AI 기본 사회’, 탄소중립을 성장 동력으로 연결하는 ‘녹색 대전환’, 국가 간 협력을 통한 글로벌 에너지 공급망 연대다.
이 대통령은 유엔 개혁과 관련해서는 조직과 사업의 중복을 줄이는 ‘유엔 80 이니셔티브’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개혁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이번 연설은 한반도 문제에 대해 한국이 대화와 다자협력의 중심에 서겠다는 외교 구상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다만 북한의 대화 참여와 미국·중국 등 관련국의 입장 조율, 단계적 비핵화의 구체적 이행 방안이 실제 협상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는 앞으로 풀어야 할 과제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