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은 자유롭다 말하지만, 정작 스스로의 삶에 대해선 침묵한다.
선택은 많아졌으나 기준은 남의 것이 되었고, 말은 넘치지만 책임은 줄었다.
이 불안한 시대의 초상 앞에서, 서양의 철학자 니체와 동양의 사상가 한비자가 다시 소환되는 이유는 분명하다.
니체는 인간에게 묻는다.
“너는 너 자신의 삶을 살고 있는가.”
그가 말한 신의 죽음은 종교의 종말이 아니라, 맹목적 가치 추종의 종언이었다.
도덕과 관습, 성공의 기준은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시대가 만든 합의에 불과하다는 선언이다.
니체가 말한 초인은 힘센 인간이 아니라, 남이 만들어준 의미를 의심할 줄 아는 인간이다.
오늘의 사회는 ‘착한 사람’을 요구한다.
그러나 니체는 경고한다.
착함이 사고를 멈추는 순간, 인간은 도구가 된다고.
하지만 니체의 사유만으로 현실을 건너기엔 세상은 지나치게 계산적이다.
여기서 한비자가 등장한다.
한비자는 인간을 선악의 존재로 보지 않았다.
그는 인간을 이익에 반응하는 존재로 보았다.
그래서 한비자는 도덕을 믿지 않았고, 제도를 설계했다.
“사람을 믿지 말고 법을 믿어라.”
“선의를 기대하지 말고, 악행을 불리하게 만들어라.”
이 사유는 차갑지만, 오늘날 조직과 국가, 기업과 사회를 움직이는 원리와 정확히 맞닿아 있다.
한비자의 법치는 인간에 대한 불신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직시였다.
문제는 우리가 이 둘 중 하나만 택하려 한다는 데 있다.
니체만 붙들면 현실을 모르는 이상주의자가 되고,
한비자만 따르면 인간을 잃은 냉혹한 관리자가 된다.
현대인에게 필요한 태도는 명확하다.
내면은 니체처럼 자유롭고, 외면은 한비자처럼 냉정할 것.
삶의 의미는 스스로 창조하되,
세상은 순진하게 해석하지 말 것.
사람을 미워하지 말되, 제도와 구조를 읽을 것.
니체는 인간에게 존엄을 돌려주고,
한비자는 사회에 질서를 부여한다.
이 두 사상은 충돌하지 않는다.
오히려 불확실의 시대에 서로를 보완한다.
자유를 말하되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 인간,
이상을 품되 구조를 이해하는 시민,
이것이 니체와 한비자가 오늘 우리에게 동시에 요구하는 인간상이다.
사유를 잃은 자유는 방종이 되고,
현실을 모르는 이상은 위험이 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선택이 아니라 균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