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령사회에 대응해 동네 병·의원의 역할을 질병 치료에서 예방과 만성질환 관리, 건강돌봄까지 넓히는 방안이 추진된다. 농어촌 등 의료취약지의 기본적인 일차의료는 국가와 지방정부의 책임을 강화하고 방문진료와 재택의료를 지역 통합돌봄에 연결하는 방안도 제시됐다.
의료혁신위원회는 27일 서울 코리아나호텔에서 제9차 회의를 열고 "초고령사회 대응 예방적 보건의료체계 구축을 위한 지역보건·일차의료 혁신 권고안"을 심의했다.
이번 권고안의 출발점은 고령화에 따른 의료 수요 변화다. 노인성질환과 노쇠, 치매뿐 아니라 여러 만성질환을 동시에 앓거나 여러 종류의 약을 함께 복용하는 고령자가 늘면서 질병이 생긴 뒤 병원에서 치료하는 방식만으로는 대응하기 어렵다는 게 혁신위의 판단이다.
이에 의료기관을 찾아온 환자를 치료하는 기존 구조에서 벗어나 주민이 생활하는 지역에서 건강 위험을 조기에 찾아내고 예방부터 치료, 돌봄까지 이어주는 체계를 구축하도록 정부에 권고했다.
우선 일차의료기관의 역할이 크게 넓어진다.
동네 병·의원이 환자의 최초 진료를 담당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질병 예방과 건강증진, 만성질환 관리, 건강돌봄을 지속적으로 제공하도록 제도와 보상체계를 정비하는 방안이다. 환자가 여러 의료기관을 오가는 과정에서 치료가 단절되지 않도록 필요한 의료서비스를 연결하고 조정하는 기능도 강화한다.
고령 환자에게 특히 필요한 방문진료와 재택의료도 지역 통합돌봄체계에 포함하도록 했다. 노쇠 예방과 다제약물 관리, 퇴원환자 관리 등을 건강·의료·돌봄 서비스와 묶어 환자가 살던 곳에서 필요한 관리를 계속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이다.
의료기관이 부족한 농어촌 등에서는 국가와 지방정부의 책임을 강화한다.
지역에 따라 보건지소와 보건진료소의 기능을 확대하고 민간 일차의료기관에 대한 지원도 늘리도록 했다. 공공과 민간이 함께 운영하는 협력형 일차의료기관을 확충하거나 의료진이 직접 지역을 찾아가는 이동·순회진료를 활용하는 방안도 권고안에 포함됐다.
보건소의 역할도 달라진다.
시·군·구 보건소가 개별 보건사업을 직접 수행하는 데 집중하기보다 지역의 건강 문제를 파악하고 정책을 설계하는 전략·기획 기능과 공중보건 위기 대응, 지역보건 총괄·조정 역할을 맡도록 하는 내용이다.
지역보건 정책의 평가 기준 역시 기관별 사업 실적에서 "지역 주민의 건강"으로 옮긴다. 사업을 몇 건 수행했는지를 따지는 대신 실제 주민 건강이 얼마나 개선됐는지, 지역과 계층에 따른 건강 격차가 줄었는지를 평가하는 체계를 마련하자는 것이다.
현재 개별 사업을 중심으로 나뉘어 있는 보건소와 일차의료기관의 업무도 연결한다. 지역 내 주요 건강 문제를 함께 파악하고 주민 건강을 공동으로 관리할 수 있는 협력체계를 구축하도록 했다.
재정지원 방식도 손질 대상이다. 개별 사업마다 정부 보조금을 지급하는 구조에서 벗어나 지역의 인구구조와 건강 상태, 의료 수요 등을 반영해 필요한 곳에 재원을 배분하는 방식을 제안했다. 지역보건기관과 일차의료기관이 협력할수록 적절한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평가와 보상체계를 바꾸는 방안도 담겼다.
주민의 건강정보를 하나로 연결하는 시스템도 추진 대상에 올랐다.
현재 따로 관리되는 지역보건 정보와 의료이용 기록, 통합돌봄 관련 정보를 표준화해 연계하고 이를 토대로 건강 위험이 높은 주민을 조기에 찾아 필요한 의료·돌봄 서비스를 연결하는 구조다. 혁신위는 인공지능을 활용한 지역사회 건강관리 플랫폼 개발과 고도화도 권고했다.
현장에서 이를 담당할 인력에 대해서는 고용 안정성을 높이는 동시에 국가 차원의 필수역량 기준과 표준화된 교육·훈련체계를 마련하도록 했다.
혁신위는 제도 개편에 앞서 지역 단위 시범사업을 실시하는 방안도 내놨다.
지역보건의료기관과 동네 병·의원, 국민건강보험공단, 지역사회 자원과 주민대표 등이 함께 참여하는 협력체계를 만든 뒤 지역별 건강 문제를 선정해 해결하는 "지역보건·일차의료 혁신 시범사업"을 추진하는 방식이다.
권고안은 지역보건의료체계 기능 강화와 일차의료 기능 확대, 지역보건과 일차의료의 협력, 법률·재정·정보·인력 기반 개편 등 4개 전략을 중심으로 구성됐다. 재택의료 확대와 재택임종 지원, 일차의료 보상체계 개편 등도 포함됐다.
정기현 의료혁신위원장은 "초고령사회에서는 주민이 사는 곳 가까이에서 건강을 미리 살피고 필요한 의료와 돌봄을 지속적으로 받을 수 있는 체계로 전환해야 한다"고 밝혔다.
혁신위는 이날 올해 하반기 소통 계획도 논의했다. 오는 11월 7일부터 8일까지 열리는 제2차 시민패널 공론화 숙의토론회에서는 "연명의료 결정제도"를 주제로 국민 의견을 수렴할 예정이다.
이번 권고안은 당장 동네 병·의원의 진료체계를 바꾸는 확정 정책이 아니라 정부에 제시한 제도개선안이다. 실제 시행을 위해서는 시범사업과 법·제도 정비, 재정 및 보상체계 개편이 뒤따라야 한다. 고령자가 병원을 찾아다니는 의료에서 의료와 돌봄이 고령자의 생활권으로 들어가는 체제로 얼마나 전환할 수 있을지가 향후 제도 설계의 핵심 과제로 남는다.
이지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