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증시에서 인공지능(AI)과 반도체 관련주가 급락한 충격이 국내 증시로 확산하면서 6일 코스피가 장 시작 3분 만에 8% 넘게 폭락했다. 코스피는 5000선 아래로 밀려났고, 한국거래소는 1단계 서킷브레이커를 발동해 주식 거래를 20분간 중단했다. 코스닥 시장에서도 매도 사이드카가 발동되는 등 양대 시장에서 급격한 매도세가 나타났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이날 오전 9시 3분 코스피 시장에 1단계 서킷브레이커가 발동됐다. 발동 당시 코스피는 전 거래일보다 459.19포인트, 8.52% 하락한 4924.61을 기록했다.
코스피가 장중 5000선 아래로 내려간 것은 지난 2월 6일 이후 약 9개월 만이다. 국내 증시가 미국 기술주 급락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으면서 개장 직후부터 매도 주문이 집중됐다.
서킷브레이커는 주가지수가 급격하게 하락할 때 시장의 과도한 변동성을 완화하기 위해 일정 시간 주식 거래를 중단하는 제도다. 코스피와 코스닥 시장에서 전일 종가 대비 8% 이상 하락한 상태가 1분간 지속되면 1단계 발동 요건을 충족한다.
1단계 서킷브레이커가 발동되면 해당 시장의 주식 거래가 20분간 중단된다. 이후 일정한 절차를 거쳐 거래가 재개된다. 이번 발동은 단순한 프로그램 매매 제한을 넘어 시장 전체의 거래를 일시 정지시켰다는 점에서 충격이 컸다.
코스피 시장에서 서킷브레이커가 발동된 것은 지난달 15일 이후 16거래일 만이다. 올해 들어서는 11번째 발동으로 집계됐다.
코스닥 시장에서도 오전 9시 6분 매도 사이드카가 발동됐다. 이에 따라 프로그램 매도호가의 효력이 5분간 정지됐다.
사이드카는 선물가격이 급변할 때 프로그램 매매가 현물시장에 미치는 충격을 줄이기 위한 장치다. 시장 전체 거래를 중단하는 서킷브레이커와 달리 프로그램 매매호가의 효력을 일정 시간 제한한다.
이날 오전 9시 7분 기준 코스피는 전 거래일보다 460.33포인트, 8.55% 내린 4923.47을 기록했다.
투자자별 매매 동향에서는 외국인의 매도세가 두드러졌다. 같은 시각 코스피 시장에서 외국인은 1337억 원을 순매도했다. 개인과 기관은 각각 426억 원, 865억 원을 순매수했지만 지수 하락을 막지는 못했다.
다만 선물시장에서는 다른 흐름이 나타났다. 오전 9시 15분 기준 외국인은 코스피200 선물시장에서 319계약을 순매수했다. 현물과 선물시장의 매매 방향이 엇갈린 만큼 외국인 투자자의 전체 포지션은 두 시장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시가총액 상위 종목은 일제히 하락했다. 특히 미국 반도체주 급락의 영향을 받은 국내 반도체와 전자부품 관련 종목의 낙폭이 컸다.
삼성전기는 14.30% 급락했고 SK스퀘어는 13.47% 하락했다. SK하이닉스는 11.71%, 삼성전자는 9.98% 떨어졌다. 삼성전자우도 8.60% 내렸다.
현대차는 6.81%, KB금융은 4.90%, 셀트리온은 3.95%, LG에너지솔루션은 3.47%, 삼성바이오로직스는 1.71% 하락했다.
반도체 대형주뿐 아니라 자동차와 금융, 바이오, 이차전지 등 주요 업종으로 매도세가 확산했다. 시장 전반에서 위험자산을 줄이려는 움직임이 나타난 것이다.
이번 급락의 직접적인 배경에는 전날 미국 뉴욕증시에서 발생한 대규모 기술주 매도가 있다.
5일 현지시간 뉴욕증시에서 기술주 중심의 나스닥종합지수는 전 거래일보다 5.52% 하락했다. 약 19개월 만에 가장 큰 하루 낙폭이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지수는 4.35%, 다우존스30산업평균지수는 3.44% 각각 하락했다.
특히 필라델피아 반도체지수는 12.25% 폭락했다. 미국 반도체업종 전반에서 대규모 매도 주문이 쏟아지면서 국내 반도체주에도 충격이 이어졌다.
미국 주요 반도체 기업들의 주가 하락 폭도 컸다. 마이크론은 17.46%, AMD는 17.26% 급락했다. 브로드컴은 10.43%, 엔비디아는 9.26% 하락했다.
SK하이닉스의 미국 주식예탁증서(ADR)도 13.40% 떨어졌다. 미국 시장에서 한국 반도체 기업에 대한 투자심리까지 악화된 것이다.
미국 증시 급락에는 AI 데이터센터 투자 확대 속도가 둔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영향을 미쳤다.
미국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상·하원 모두를 장악하면서 AI 데이터센터 건설과 전력 사용 등에 대한 규제가 강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시장에 확산했다.
대규모 데이터센터 건설에 필요한 전력 확보와 인허가 문제도 투자자들이 주목하는 변수다. AI 인프라 투자가 지연될 경우 반도체와 서버, 전력설비 등 관련 산업의 수요 증가 속도에도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일부 네오클라우드 기업과의 계약을 재검토한다는 보도 역시 AI 인프라 투자에 대한 불안을 키웠다.
네오클라우드는 AI 연산에 필요한 고성능 그래픽처리장치와 데이터센터 인프라를 제공하는 클라우드 사업자를 뜻한다. 이들 기업의 설비 투자와 계약 규모는 엔비디아를 비롯한 AI 반도체 기업들의 실적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다만 데이터센터 투자 둔화 가능성이 제기됐다는 사실만으로 실제 반도체 수요가 감소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투자자들이 향후 성장 속도와 기업가치를 다시 평가하는 과정에서 주가 변동성이 확대된 측면도 있다.
코스닥 시장도 급락을 피하지 못했다. 오전 9시 7분 기준 코스닥지수는 전 거래일보다 46.57포인트, 6.86% 하락한 631.84를 기록했다.
코스닥에서는 개인이 662억 원을 순매도한 반면 기관과 외국인은 각각 116억 원, 552억 원을 순매수했다.
코스닥 시가총액 상위 종목도 모두 하락했다. 심텍은 9.91%, 레인보우로보틱스는 9.87%, 에코프로비엠은 8.81%, 주성엔지니어링은 8.73% 떨어졌다.
알테오젠은 7.42%, 이오테크닉스는 7.15%, 리노공업은 7.06%, 삼천당제약은 6.91% 하락했다. 에코프로와 HLB도 각각 6.33%, 4.94% 내렸다.
반도체 장비와 로봇, 이차전지, 바이오 등 코스닥 주요 성장주에서도 매도세가 집중됐다.
미국 주가지수 선물 역시 약세를 나타냈다. 이날 오전 9시 6분 기준 나스닥100 선물은 0.06%, S&P500 선물은 0.17% 하락했다.
국내 증시의 급락은 최근 주가 상승을 이끌었던 반도체와 AI 관련 산업에 대한 투자심리가 얼마나 빠르게 변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국내 증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큰 만큼 두 기업의 주가 변동이 코스피 전체 지수에 미치는 영향도 크다.
이번 하락이 단기간의 투자심리 위축에 그칠지, AI 인프라 투자와 반도체 수요에 대한 실질적인 평가 변화로 이어질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서킷브레이커 발동으로 20분간 중단된 코스피 거래는 정해진 절차에 따라 재개된다. 한국거래소는 장중 지수 변동과 프로그램 매매 동향을 감시하며 시장 안정 조치를 이어간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비롯한 반도체 대형주에는 개장 직후부터 매도 주문이 집중됐다.
백설화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