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용허가제(E-9)로 입국한 미얀마 국적 노동자들이 합법적으로 사업장을 이탈하는 편법 통로가 전남 지역 농촌의 인력난을 재촉하고 있다. 이들이 국내에 들어온 뒤 미얀마 정세 불안을 이유로 인도적 체류 자격(G-1-99, 난민 비자)으로 비자를 변경하는 사례가 잇따르면서, 원칙적으로 사업장 이동이 금지된 E-9 제도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다.
현장 농민들은 수확을 코앞에 둔 농작물을 속수무책 포기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전남의 한 농가에서는 양상추가 제때 수확되지 못해 거뭇해진 밑동을 드러낸 채 밭에서 그대로 말라붙었다. 지난 추석 연휴, 일하던 미얀마 노동자 2명이 아무런 예고 없이 짐도 챙기지 않은 채 사라졌기 때문이다. 피해 농민 김상연 씨는 "우리 동네 이 시기에는 결혼식도 안 잡을 만큼 바쁘다"며 "잠도 안 오고 정말 눈물밖에 안 난다"고 참담한 심경을 토로했다.
이들의 무단이탈은 관계 부처 간의 "칸막이 행정"이 빚어낸 구조적 허점 때문에 가능했다. 현행 고용허가제(E-9 비자)는 고용노동부 소관으로, 입국한 노동자가 지정된 사업장에서만 일하도록 엄격히 제한한다. 그러나 이들은 법무부 소관인 난민 비자로 체류 자격을 변경하는 방식을 악용했다.
법무부가 미얀마 노동자의 G-1-99 비자 변경 신청을 승인하면, 이들은 더 이상 E-9 비자의 사업장 제한 규정에 묶이지 않게 된다. 문제는 법무부가 이 비자 변경 사실을 고용노동부에 통보할 법적 의무나 근거가 없다는 점이다. 고용주는 노동자가 이미 합법적으로 사업장을 떠날 자격을 얻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일방적인 이탈 통보를 받는 셈이다.
또 다른 피해 농민 하흥일 씨는 "미얀마는 (정세 문제로) 난민이 되면 제재를 안 받는 걸 본인들도 다 알고 있다"며 "정부가 (이탈을) 합법적으로 만들어준 꼴"이라고 정부 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문길주 전남노동권익센터장 역시 "고용노동부에 비자 변경이 통보가 안 됐다고 한다면 이건 행정에 대한 문제고, 이주민 정책 비자 시스템에 굉장히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최대 4년 10개월까지 체류 가능한 E-9 비자에서 6개월 단기 체류 비자인 난민 비자로 자격을 변경한 사례는 올해만 1,420명에 달한다. 행정적 구멍으로 인한 피해가 고스란히 농가에 전가되고 있다는 비판이 거세지자, 법무부는 "비슷한 피해가 재발하지 않도록 관련 제도를 보완하고 개선하겠다"고 뒤늦게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