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부가 가습기살균제 참사와 관련하여 국가의 관리 감독 소홀에 따른 배상책임을 다시 한번 인정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46부(부장판사 김형철)는 22일 이 모 씨 등 피해자 7명이 국가와 제조 및 판매업체들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국가의 과실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이번 판결은 소송 제기 13년 만에 나온 1심 결과로, 과거 정부의 화학물질 안전관리 체계가 미흡했음을 사법부가 재차 공식화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재판부는 국가가 가습기살균제 원료 물질의 유해성을 심사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주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특히 유해성이 의심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행정권을 행사하지 않아 피해를 키웠다는 점을 지적하며 국가의 배상책임 성립을 인정했다. 이는 지난 2024년 2월 서울고법이 국가 책임을 최초로 인정한 이후 사법부의 확립된 견해로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만 재판부는 국가가 실제로 지급해야 할 배상금은 없다고 판시했다.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를 위한 특별법에 따라 피해자들이 이미 국가로부터 구제급여를 받은 경우, 이를 손해배상액에서 공제하는 손익상계 원칙을 적용했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이미 지급된 구제급여가 산정된 손해배상액을 상회하거나 갈음한다고 보아 국가의 실질적인 금전 지급 의무는 남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제조 및 판매업체들에 대한 판단에서는 업체별로 희비가 엇갈렸다. 재판부는 소규모 업체인 세퓨에 대해서만 피해자 3명에게 각각 800만 원에서 1000만 원의 배상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반면 가장 많은 피해자를 낸 옥시레킷벤키저와 원료 제조사 한빛화학 등에 대한 청구는 기각했다. 이는 이미 해당 업체들과 합의가 이루어졌거나 소멸시효가 지나는 등 법리적 사유가 작용한 결과로 풀이된다.
이번 소송은 2012년 8월 처음 제기된 이후 무려 13년 5개월 동안 진행된 장기전이었다. 한때 소송 참여자가 80여 명에 달했으나, 오랜 재판 과정에서 대다수 피해자가 소송을 취하하거나 화해 권고를 받아들여 최종적으로 7명에 대한 판단만 남게 되었다. 앞서 2024년 6월 대법원은 국가 책임을 인정한 서울고법의 판결을 확정하며 가습기살균제 사태의 법적 책임 소재를 가린 바 있다.
이번 판결은 국가의 책임을 다시금 명확히 했다는 상징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추가 배상을 받지 못한 피해자들에게는 아쉬움을 남겼다. 법조계에서는 이번 판결이 향후 유사한 사회적 참사에서 국가의 행정적 책임을 묻는 중요한 선례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정부는 이번 판결을 계기로 화학물질 안전 관리망을 더욱 촘촘히 구축하고 피해자 지원 체계를 내실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