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중앙에서 사업을 정해 지역에 내려보내던 방식에서 벗어나 지방정부가 필요한 의료사업을 직접 설계하는 지역필수의료 지원체계를 내년부터 가동한다. 지역별로 다른 의료 공백을 시·도가 직접 진단하고 예산을 투입하도록 하는 사업에 3605억원을 편성했다.
보건복지부는 10일 서울 국제전자센터에서 16개 시·도 보건국장과 권역책임의료기관 공공부원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제4차 "지역·필수·공공의료 추진전략 중앙·지방 협의체"를 열었다.
이날 논의의 중심에는 2027년 신설되는 지역필수의료특별회계가 놓였다. 정부가 편성한 특별회계 예산안은 총 1조2614억원이다. 신규 사업 3689억원과 기존 여러 회계와 기금에 나뉘어 있던 관련 사업 8925억원을 특별회계로 묶었다.
가장 큰 신규 사업은 3605억원 규모의 "지역주도 의료공백 해소 지원사업"이다.
중앙정부가 전국에 동일한 사업을 제시하는 방식이 아니라 시·도별로 재원과 기본적인 사업 방향을 제시하면 지방정부가 지역의 의료 여건을 분석해 필요한 사업을 결정한다.
예를 들어 같은 의료취약지역이라도 어떤 지역은 소아·분만 의료가 부족하고 다른 지역은 응급·중증환자를 치료할 의료기관이나 의료인력이 부족할 수 있다. 정부는 지역별 상황이 다른 만큼 지방정부가 실제 부족한 의료서비스를 찾아 재원을 집중할 수 있도록 사업 구조를 바꾸겠다는 것이다.
사업을 설계할 수 있는 권한이 커지는 대신 지방정부의 책임도 강화된다. 정부는 시·도가 제출한 사업계획의 충실성과 실제 추진 성과 등을 평가해 인센티브를 제공할 계획이다.
국립대병원 등 지역 의료의 중심 역할을 맡는 17개 권역책임의료기관에도 대규모 재정이 투입된다.
정부는 내년 권역책임의료기관의 임상역량과 의료기관 간 협력체계를 강화하는 데 2551억원을 편성했다. 올해보다 1397억원 늘어난 규모다.
투자는 인력과 의료 인프라, 인공지능 전환, 지역 의료기관 협력체계 구축 등 4개 분야에 집중된다.
필수진료과 교수를 새로 채용하고 장기간 지역에 근무하는 교수진에 대한 보상을 확대한다. 각 지역이 경쟁력을 갖춘 진료 분야는 수도권 이른바 "빅5 병원" 수준까지 육성하는 방안도 추진한다.
지역 의료기관의 AI 활용을 위한 기반 구축도 본격화한다.
정부는 국가 고성능 연산장치인 GPU를 기반으로 하는 "공공의료 AI 플랫폼"을 만들고 전국 권역·지역 책임의료기관 72곳을 연결하는 "공공의료 AI 고속도로"를 구축하고 있다.
개별 공공병원이 고가의 AI 장비와 시스템을 각각 구축하지 않아도 국가 플랫폼을 통해 영상 판독과 의무기록 작성, 환자 의뢰·회송 문서 작성 등 AI 서비스를 공동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이다.
공공의료 AI 고속도로는 올해 하반기 9개 책임의료기관에서 시범 운영을 시작한다. 2027년에는 30곳으로 늘리고 2029년 전국 72개 책임의료기관으로 확대하는 일정이다.
의사가 부족한 섬과 산간지역에도 AI가 투입된다.
정부가 지난달 발표한 "AI 기본의료 전략"에 따라 보건소와 보건지소, 의료취약지 1차 의료기관에는 진료와 행정, 건강관리를 지원하는 AI 패키지를 보급한다. 영상 판독과 진료기록 작성, 만성질환 관리 등의 업무를 AI가 보조하는 방식이다.
의료진이 부족한 지역에서는 방문간호사와 원격지 의사를 연결하는 "AI 기반 재택 협진" 시범사업도 추진한다. 방문간호사가 환자의 건강정보를 확인하고 AI 분석 결과를 활용해 원격지 의사와 협진하는 구조다.
정부가 지역필수의료 정책의 중심을 지방정부와 권역책임의료기관으로 옮기는 데는 지역에 따라 의료공백의 형태가 크게 다르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수도권과 동일한 의료체계를 지역마다 구축하기보다 각 지역에서 실제 부족한 진료 분야에 재원을 집중하겠다는 것이다.
특히 국립대병원 등 권역책임의료기관에는 중증·필수의료뿐 아니라 지역 의료기관을 연결하는 역할까지 맡긴다. 환자가 치료를 받기 위해 수도권 대형병원으로 이동하는 구조를 줄이고 지역 안에서 진단부터 치료까지 이어지는 의료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목표다.
이번 사업은 아직 확정 예산이 아니다. 지역필수의료특별회계 1조2614억원을 포함한 2027년도 정부 예산안은 국회 심의를 거쳐야 한다. 지역필수의료특별회계는 2027년 1월 1일부터 시행되고, 근거가 되는 "필수의료 강화 지원 및 지역 간 의료격차 해소를 위한 특별법"은 같은 해 3월 11일 시행될 예정이다.
복지부는 이날 시·도와 권역책임의료기관이 제시한 의견을 토대로 지역별 재원 배분 방식과 투자 우선순위, 세부 사업계획을 구체화하기로 했다. 지방정부가 3605억원의 재원을 어떤 의료공백에 우선 투입할지는 국회 예산심의와 지역별 사업계획 수립을 거쳐 결정된다.
박현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