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봐, 해봤어?"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따라붙는 말이다. 불가능하다는 보고를 받을 때마다 실제로 시도해봤는지를 되물었던 그의 경영 방식이 짧은 문장에 담겼다. 기업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창업자와 경영자들이 남긴 말은 때로 기업의 경영철학을 설명하는 상징으로 남았다.
정주영 명예회장의 "이봐, 해봤어?"는 한국 기업인 어록 가운데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표현이다. 전·현직 대기업 홍보책임자 모임인 한국CCO클럽이 2015년 전국경제인연합회 "재계 인사이트" 독자 278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도 대표적인 기업인 어록 1위에 올랐다.
정 명예회장은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자동차 수리업과 건설업을 거쳐 현대그룹을 일궜다. 조선소 건설과 해외 건설시장 진출 등 당시로서는 성공을 장담하기 어려웠던 사업에도 뛰어들었다. "이봐, 해봤어?"라는 말은 어려운 일을 앞두고 주저하는 임직원들에게 실제 행동에 옮겨봤는지를 묻던 그의 태도를 상징한다.
고 이건희 삼성그룹 선대회장이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던진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는 말도 한국 기업사의 대표적인 어록으로 남았다.
당시 이 회장은 삼성의 품질과 조직문화에 강한 위기의식을 드러내며 대대적인 변화를 주문했다. 양적 성장에서 벗어나 품질을 우선하는 경영으로 전환하자는 "신경영 선언"이었다. 이후 삼성은 품질 개선과 인재 육성, 기술 투자를 확대하며 글로벌 시장에서 사업 영역을 넓혔다.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는 인재를 중시한 기업인으로 평가받는다. 삼성의 성장 과정에서 사람을 선발하고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인사 원칙을 중시했고 인재 확보를 기업 경영의 핵심으로 삼았다.
이 창업주의 경영철학은 흔히 "기업은 사람이다"라는 말로 요약된다. 다만 이 문구는 여러 자료에서 이 창업주의 어록으로 소개되고 있지만 정확한 최초 발언 시점과 원문이 명확하지 않아 직접 인용보다는 그의 인재 중심 경영철학을 압축한 표현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고 구인회 LG그룹 창업주의 경영철학을 대표하는 말로는 "한 번 믿으면 모두 맡겨라"가 꼽힌다. 사람을 선택했다면 권한과 책임을 함께 줘야 한다는 인재 경영의 원칙을 압축한 표현이다. 이 말 역시 국내 대표 기업인 어록 가운데 하나로 꾸준히 소개돼 왔다.
SK그룹의 기반을 닦은 고 최종현 선대회장도 사람을 기업 성장의 중심에 놓았다. 그는 인재 육성과 장기적인 투자를 강조했고 당장의 실적보다 미래 성장 기반을 확보하는 경영에 힘을 쏟았다. SK가 인재 양성과 장기 투자에 무게를 둔 배경에도 이러한 경영철학이 자리 잡고 있다.
고 신격호 롯데그룹 창업주는 현장과 책임을 중시하는 경영자로 알려졌다. 식품에서 유통과 호텔, 화학으로 사업을 확장하면서 직접 현장을 챙기는 경영을 이어갔다.
신 창업주의 경영철학은 기업의 성공뿐 아니라 실패에 대해서도 경영자가 책임져야 한다는 책임경영으로 요약된다. 다만 그에게 귀속되는 일부 명언은 정확한 최초 발언 기록이 확인되지 않는 경우가 있어 경영철학과 실제 발언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포스코를 이끈 고 박태준 명예회장의 기업가 정신은 "제철보국"이라는 네 글자에 압축돼 있다. 자본과 기술이 부족했던 시절 국가 산업화를 위해 제철소를 건설한다는 목표를 세웠고 포항제철 건설을 지휘했다.
포항제철은 이후 자동차와 조선, 기계 등 국내 제조업에 철강을 공급하는 산업 기반으로 성장했다. 박 명예회장의 "제철보국"은 기업의 성장과 국가 산업화를 연결했던 당시 경영철학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표현으로 남았다.
고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이 남긴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말은 1989년 출간된 같은 제목의 책과 함께 한 시대를 상징하는 문장이 됐다.
대우는 해외시장 개척에 공격적으로 나섰고 김 회장은 세계 각국을 직접 다니며 사업을 확대했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문구는 2015년 한국 기업인 대표 어록 조사에서도 정주영, 이건희에 이어 상위권에 올랐다.
이들 기업인이 활동했던 시대와 기업의 운명은 서로 달랐다. 성공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일부 기업은 해체됐고 경영 과정에서 사회적 논란이나 실패를 겪은 기업인도 있다. 기업인의 명언을 결과만으로 평가하기 어려운 이유다.
그럼에도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들의 말이 반복해서 등장하는 것은 당시 기업들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를 짧은 문장 안에서 보여주기 때문이다.
정주영의 실행, 이건희의 변화, 이병철과 구인회의 인재 경영, 최종현의 장기 투자, 신격호의 책임과 현장 경영, 박태준의 제철보국, 김우중의 세계시장 개척은 한국 기업들이 산업화와 세계시장 진출 과정에서 내세웠던 서로 다른 경영 원칙이었다.
반도체와 인공지능, 바이오, 로봇 등 새로운 산업을 놓고 세계 기업들이 다시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시대다. 과거 기업인들이 남긴 한마디가 오늘까지 기억되는 이유도 말 자체보다 그 뒤에 실제 사업과 투자, 실패와 재도전이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이수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