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리’의 인문에세이
왜 인문학 공부가 필요한가?
영화 ’국제시장‘의 배경이 되었던 남포동 인근에는 헌책을 주로 파는 오래된 서점들이 있다. 어릴 적 나는 주머니가 두툼해진 주말에는 보물이라도 건지려는 듯 거의 모든 책방을 들쑤시고 다녔다. 헌책이 가진 세월의 무게가 중력을 발휘하여 나를 당긴 것인지, 고서적에 묻힌 선현들의 지혜가 어떤 힘을 이루어 날 이끌었는지는 모르지만, 습관처럼 오래된 책 한두 권을 사오곤 했다. 더러 읽히는 책이 있었으나, 대부분은 많은 세월을 함께하며, 오랜 친구처럼 곁에 머물러 있다.
쌓인 책에도 80:20의 법칙이 적용되는데, 80을 이루는 다수는 전시용으로, 20은 최소한 읽은 흔적이 있는 것들이다. 서점에서 마음과 집에서 마음이 다르다. 고전이라 불리는 책 대부분은 쉽게 진면모를 드러내지 않는다. 표지 제목 너머에 숨겨진 비밀을 찾아가는 여정은 즐거운 노동이다. 어려운 텍스트가 깨달아지는 순간의 환희를 위해서는 고통이 따른다. 고전 읽기는 운동연습 없이 올림픽 경기에 나가는 것과 같다. 준비 부족은 예선 탈락으로 이어진다. 책을 펼친다.
“바람과 우레는 더함이니 군자는 이것으로 좋은 것을 보면 바꾸고 허물은 고친다.”
_주역 ‘상전’
이해되지 않는다.
“큰 꾀는 느긋하고, 작은 꾀는 좀스럽고
큰 말은 담박하고, 작은 말은 시끄럽고,
잠잘 때는 꿈으로 뒤숭숭하고,
깨어있을 때는 감각 기관이 일을 시작하고,
접촉하는 일마다 말썽을 일으키고,
마음은 날마다 싸움질에나 쓰고,
더러는 우물쭈물, 더러는 음흉, 더러는 좀생이
작은 두려움에는 기죽고, 큰 두려움에는 기절하고”
_장자 ‘제물론’
지식과 감정의 변화무쌍함을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제대로 이해되지 않는다.
“오늘날 은유와 더불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은유를 근거로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은유가 없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이것은 오랜 주제다.
마음을 빼앗고, 서구를 지배하고, 독점하고 있으며,
우리는 거기에 자주 거주하고 있다.”
_자크 데리다
제대로 이해하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책을 덮는다. 치우기 전, 쌓여버리는 가을 단풍 낙엽처럼 쉽게 읽히지 않는 책이 점점 쌓여간다.
살아가며 겪는 수많은 고뇌와 고통, 그리고 즐거움과 환희의 날들을 겪어서야 이해되는 것이 있다. 이런저런 지식이 더해져야 읽히는 책도 있다. 물리적 성질 중 일부가 급격히 변하는 상전이 현상이 책에서도 발생한다. 책은 얼음, 물, 수증기로 모습을 바꿔가며, 이해되기를 거부한다. 고전이 특히 그렇다. 엄청난 추상화와 은유를 통해 지혜를 전달하는 고전은 지혜를 겹겹이 감싸고 있어서 쉬이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남태평양 섬을 유독 좋아하는 나는, 첫 배낭여행으로 섬이 많은 필리핀으로 떠났었다. 낭만이 악몽으로 변하는 것은 순간이다. 어쩌면 낭만은 언제나 악몽과 함께할지도 모른다.
어디로 갈지, 어디서 머물지는 가서 생각해보기로 하였다. 낯선 나라의 공항에 도착한 나는 생면부지 기사에게 그냥 머물기 괜찮은 호텔로 안내해 달라고 했다. 여행이 낭만적이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 하룻밤이면 충분했다. 호객꾼이 가득한 술집과 허름한 호텔에 버려진 나는 호텔 침구류에서 나는 퀴퀴한 냄새, 천장에 붙어 있는 도마뱀, 후텁지근한 에어컨의 끈적함, 길거리에서 들리는 낯선 언어, 희망을 잃은 듯한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며, 푸른바다와 야자수를 꿈꾸며 날아온 나의 상상력에 균열이 가는 소리를 들었다. 두 달을 계획한 예산은 사기에 사기를 당하며 소진되어, 2주 만에 국제 호구임을 인증한 나는 갈 곳 없는 신세로 전락한다.
낭만이 위험한 것은 애써 어두운 측면을 외면하기 때문이다. 두 팔 벌려 나를 환영할 것만 같았던 마닐라의 첫 밤은 그렇게 나를 밀쳐내고 있었다.
결핍은 또 다른 움직임을 낳는다. 야생에서 생존하는 법을 그때 터득했는지도 모른다. 삶을 긍정하면 그런대로 살아진다는 것을 배웠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바람이 불지 않는다.
그래도 살아야겠다.”
_폴 발레리 “해변의 묘지”
역경은 내가 몰랐던 나의 모습이 있음을 보게 한다. 온실 속에서 큰 나무가 자랄 수 없는 것처럼, 비와 바람은 더 깊이 뿌리내리게 만들어 시련을 이기게 한다. 나무가 가진 모든 힘이 발휘되기 위해서는 가혹한 환경에 놓여야 한다. 온실 밖에서 더 많은 빛과 비를 맞는다. 바람과 태풍을 경험할 수 있다. 살면서 이보다 더한 위기와 좌절의 순간들은 많았지만, 언제나 포기하지 않으면, 살아갈 방법이 수만 가지로 펼쳐졌다.
‘힘은 희망뿐 아니라 절망에서도 온다.’
_호메로스 ‘일리아드’
인문학 공부를 한다는 것은 정신적인 모험을 강행하는 것인데, 모험은 그 속성상 수많은 마주침을 수반하며 그 속에 떨림과 설렘이 공존한다. 더러는 그런 마주침을 통해 나의 다른 모습도 보게 되며, 내가 아닌 나의 거추장스러운 모습들을 깎아내야만 들어갈 수 있는 동굴을 마주할 때도 있을 것이다. 좁고 어두울수록 많은 비밀을 지닌 동굴은 두꺼운 옷을 입고는 들어갈 수가 없다. 버릴 줄 아는 용기가 있어야 비로소 얻게 되는 것이 있다.
나의 나 됨을 알아가는 정신의 여행은 다소 홀가분해진 새로운 나를 찾아가는 동시에, 일상의 나를 떠나는 수행과 같다.
그래서,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용기와 끈기가 있어야 한다. 무모한 도전을 즐기는, 개척정신이 투철한 사람이 되고, 언제나 일어설 수 있는 회복력이 강한 사람이 된다. 정신적으로 나약한 사람이 많아지는 이 시대에 한국에 인문학 공부가 필요한 이유다.
주역은 점서가 아니다. 절대적으로 옳은 어떤 진리를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다. 때와 장소에 따라 다른 사물의 모습과 태도가 중요함을 이야기한다. 사물의 속성이 그것이 머무는 시간과 환경에 따라 달라짐을 이야기한다. 때와 장소에 맞는 태도와 자세가 중요하다고 한다.
3, 4월의 바람은 벌레를 깨우며 만물을 소생시키고, 5, 6월의 바람은 생기를 더한다. 7, 8월의 더운 바람은 사람들을 해변과 계곡으로 몰아간다. 9, 10월의 바람은 마지막 빛날 기회를 주고, 11, 12월의 바람은 만물에 휴식을 준다. 하늘의 바람은 구름을 움직이고, 땅 위의 바람은 나무를 흔든다. 물속의 바람은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땅속 바람은 지진을 일으킨다.
바람과 우레는 더함이다. 바람이 커지면 우레도 커진다. 바람은 힘을 덜어 우레를 키운다. 좋은 것을 곁에 두면 상생작용이 있다. 좋지 않은 것은 더 커지기 전에 덜어내야 한다. 바람과 우레처럼 커질 수 있다. 좋은 습관은 키우고 안 좋은 습관은 버리라고 이야기한다.
언덕에서 굴린 눈은 내려오면서 점점 커져서 거대한 눈덩이를 이룬다. 시작은 미약하나 도착점에서의 모습은 매우 다르다. 긍정의 피드백을 가져오는 현상이다. 진실한 친구 한 명을 두었더니, 곧 둘이 되고 셋이 되었다. 그리고 다섯이 되고 열이 되었다. 하나에 하나를 더하니 둘이 되고 그 둘에 하나를 더하니 셋이 된 것이다. 그래서 진실한 하나는 다섯이 될 수도 있고, 열이 될 수 있다.
인문학은 보이는 현상 넘어 있는 것을 보게 하는 힘을 길러준다. 작은 씨앗 속에서 거대한 나무를 보고, 나비의 펄럭임에서 태풍을 보게 한다. 작은 도미노 속에서 달까지 높이 솟아있는 도미노를 무너뜨리는 힘이 있음을 보는 것이며, 익은 대추 속에서 가을을 보는 것이다. 일렁이는 물결 속에서 보이지 않는 바람을 보는 것, 일상적인 시선과 예술가의 시선 사이에 어떤 시선을 키워주는 것이 인문학 공부다. 이것이 21세기에 인문학이 필요한 두 번째 이유이다.
지식은 변하고 그런 지식을 가진 우리 생각도 변한다. 생각에 따라 감정도 변한다. 우리의 정신은 비어있기 때문에 많은 것들이 들어와 자리를 차지한다. 하루에도 자리바꿈을 하면서, 여러 차례 변한다. 배가 고프면 예민해지고, 부르면 귀찮아진다. 쓸데없는 논쟁에는 목숨 걸고 달려들고, 중요한 문제엔 관심이 없다. 이런 불협화음의 총체가 실존하는 ‘나’를 이룬다. 그래서 우리는 ‘착각’에 빠져서 산다. 큰 꾀와 작은 꾀, 작은 두려움과 큰 두려움으로 가득 찬 인간은 인문학적 탐구와 성찰을 통해 좀 더 객관적인 존재로 나아간다. 객관적인 존재는 다툼이 적다. 관계 속에서 균형을 유지할 수 있다. 시비를 가리는 눈이 생긴다. 이것이 인문학 공부가 필요한 세 번째 이유이다.
‘유키즈’에서 유재석이 어느 초등학생에게 물었다.
“잔소리와 충고의 차이점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잔소리는 왠지 기분 나쁜데, 충고는 더 기분 나빠요!”
아이는 두 단어 속에 있는 유사성과 차이점을 단번에 파악하고 이에 유머를 더한다. 생각에 생각이 더해지면 사물이나 현상의 속성이 보인다. 그리스 신화의 신들은 은유다. 헤르메스는 ‘전령의 신’이고 ‘여행과 상업, 도둑의 신’이다. ‘Herma’는 돌무더기를 뜻하고, 이것은 갈림길에서의 이정표가 된다. 그래서 헤르메스는 움직임을 담고 있는 은유적 상징물이 된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도 영웅들은 여러 가지 상징적인 모습으로 표현되며, 전쟁 또한 직유나 제유로 묘사된다. 역사상 최고의 책으로 평가받는 책들은 온통 은유로 이루어져 있다. 장자의 우화가 그렇고, 예수님의 복음이 그렇다. 이것이 인문학 공부가 필요한 마지막 이유라고 나는 생각한다. 유사성과 차이점을 구분하는 능력이 인문학적 사고의 정점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인문학 공부로 조성된 마음의 생태계는 다양한 종이 살고 있어서, 쉽게 파괴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다양성 속에 새로운 종이 탄생하게 된다. 이렇게 탄생한 ‘창의성’은 21세기를 이끌어가는 한국의 지성인에게 꼭 필요한 마지막 요소라고 나는 생각한다.
“가장 훌륭하고 가장 알찬 결실을 남긴 사람들의 삶을 찬찬히 뜯어보면서, 그대 자신에게 악천후와 폭풍을 견디지 못하는 나무들이 장래에 거목으로 훌쩍 자랄 수 있을지 한번 물어보라. 불운과 외부의 저항, 어떤 종류의 혐오, 질투, 완고함, 불신, 잔혹, 탐욕, 이런 것들이 호의적인 조건에 속하지 않는지 곰곰이 따져보라. 이런 것들을 경험하지 않고는 어떤 위대한 미덕의 성장도 좀처럼 이룰 수 없다.”
_니체 “즐거운 학문; 쾌락과 고통은 서로 단단하게 묶여있기 때문에."
Mov Education 송병민(minaryssam@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