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34~36주 무렵 제왕절개 방식으로 임신중지 수술을 받은 여성이 항소심에서 살인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법원은 여성이 태아가 사산된 상태로 나온다고 믿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반면 살아서 태어난 아기를 숨지게 한 의료진에게는 살인죄를 인정해 실형을 선고했다.
서울고등법원 형사5부는 지난 23일 살인 혐의로 기소된 권모 씨에게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한 1심을 파기하고 무죄를 선고했다.
병원장 윤모 씨와 수술을 집도한 심모 씨에 대한 살인죄 판단은 유지됐다. 다만 윤 씨의 형량은 1심 징역 6년에서 징역 4년으로, 심 씨는 징역 4년에서 징역 2년 6개월로 줄었다. 윤 씨에게는 벌금 150만원과 추징금 900만원도 명령했다. 임신중지 환자를 소개하고 알선비를 받은 브로커 2명에게는 징역형의 집행유예가 선고됐다.
사건은 2024년 6월 인천의 한 산부인과에서 발생했다. 당시 임신 34~36주였던 권 씨는 제왕절개 방식으로 임신중지 수술을 받았다. 이후 임신 사실을 알게 된 과정과 수술·회복기를 담은 영상을 유튜브에 공개하면서 사건이 알려졌고, 보건복지부의 수사 의뢰로 경찰 수사가 시작됐다.
1심은 권 씨가 임신 후기 태아의 생존 가능성을 알고도 제왕절개 수술을 선택한 만큼 출생 이후 살해될 가능성까지 미필적으로 용인했다고 판단했다.
항소심 판단은 달랐다. 재판부는 권 씨가 수술 전 브로커를 통해 “태아가 사산돼 나온다”는 설명을 들었고, 이를 의료진에게 확인된 내용으로 믿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검찰이 제출한 증거만으로 권 씨가 의료진과 살인을 공모했거나 출생 후 살해 가능성을 인식하고 받아들였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판단이다.
권 씨가 수술 후 공개된 유튜브 채널에 영상을 올린 점도 무죄 판단의 근거가 됐다. 재판부는 권 씨가 살아서 태어난 아기를 의료진이 사망에 이르게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불특정 다수가 볼 수 있는 채널에 수술 과정을 공개한 행동을 납득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의료진에 대해서는 살아서 모체 밖으로 나온 아기를 사망에 이르게 한 행위가 임신중지가 아닌 살인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피해자가 자연분만이 가능할 정도로 성숙하고 건강한 상태였으며, 병원장과 집도의가 사망 결과를 인식하면서 암묵적으로 공모했다고 봤다.
재판부는 사람의 생명을 침해해 회복할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한 중대한 범행이라고 지적했다. 다만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권 씨의 임신 종결 의사, 의료진의 나이와 건강 상태, 범행 가담 정도 등을 양형에 반영해 형량을 낮췄다.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는 권 씨에 대한 무죄 선고를 환영하면서 의료진의 유죄 판단이 유지된 데 대해서는 우려를 나타냈다. 정부가 임신중지 시기와 절차, 후기 임신중지의 의료 기준과 의료인의 책임 범위를 정하지 않은 채 제도 공백의 부담을 의료진에게 떠넘겼다는 주장이다.
헌법재판소는 2019년 형법상 낙태죄 조항에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고 2020년 말까지 관련 법률을 개정하도록 했다. 그러나 후속 입법이 이뤄지지 않으면서 해당 조항은 2021년 1월 1일부터 효력을 잃었다.
그로부터 약 5년 7개월이 지났지만 임신중지가 허용되는 시기와 의료 절차, 후기 임신중지에 대한 판단 기준은 여전히 법률로 정비되지 않았다. 이번 판결 이후에도 의료현장에 적용할 명확한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는 입법 과제가 남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