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지역·일차의료 정책에 서로 다른 공간 기준을 제시하자 개원 내과 의사들이 적용 범위를 명확히 밝히라고 요구했다. 대면진료는 생활권 안에 묶으면서 비대면진료와 인공지능 협진은 지역 경계를 넘어 확대하는 정책도 서로 충돌한다고 비판했다.
대한내과의사회는 12일 성명을 내고 의료혁신위원회 산하 초고령사회 의료체계 전문위원회가 제시한 "초고령사회 예방적 보건의료체계 구축을 위한 지역보건·일차의료 권고안"과 정부의 지역·일차의료 정책 사이의 관계를 분명히 해야 한다고 밝혔다.
쟁점은 "소진료권"과 "소생활권"이다. 정부가 지난달 30일 의료혁신위원회에 보고한 "지역·필수·공공의료 강화 추진전략"은 전국의 의료 이용권역을 대진료권과 중진료권, 소진료권으로 구분했다. 대진료권은 5극3특, 중진료권은 70개 권역, 소진료권은 시·군·구를 기준으로 한다.
정부 구상에 따르면 소진료권에서는 동네의원과 보건소, 공공보건의원이 경증질환 진료와 만성질환 관리, 예방적 건강관리를 담당한다. 중진료권에서는 지역거점 공공병원과 포괄 2차 종합병원이 중등도 질환과 필수의료를 맡고, 대진료권에서는 국립대병원과 상급종합병원이 중증·고난도 진료를 담당하는 구조다.
반면 초고령사회 의료체계 전문위원회의 권고안에는 "소생활권"이라는 별도의 기준이 제시됐다. 소생활권은 주민들이 일상생활을 함께하고 물리적·사회적 환경과 지역자원을 공유하는 지역 단위다. 도시기본계획에서는 대체로 인구 2만∼5만명 규모의 행정동 중심 생활권을 가리킨다.
내과의사회는 "같은 정부 안에서 이틀 간격으로 보고된 두 문서가 서로 다른 공간 단위를 제시했다"며 "의원급 의료기관의 진료 범위와 환자 등록에 어느 기준이 적용되는지 분명히 밝혀야 한다"고 촉구했다.
다만 정부가 소생활권을 의원의 진료 범위나 환자 등록 제한 기준으로 확정한 것은 아니다. 현재 공개된 권고안은 초고령사회에 대응해 지역보건과 일차의료의 연계 방안을 제안한 단계다. 내과의사회는 소생활권 개념이 향후 제도 설계 과정에서 환자 등록과 의료기관 이용 기준으로 확대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의사회는 행정동을 기준으로 일차의료 체계를 구성하면 동네의원이 진료할 수 있는 환자의 범위와 수가 제한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단체는 "명칭만 다를 뿐 인두제와 다름없다"며 일차의료기관 위축과 의료전달체계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고 밝혔다.
거주지만을 중심으로 진료권을 설정하는 방식도 실제 의료 이용과 차이가 있다고 지적했다. 환자는 질환의 종류와 급성·만성 여부, 교통수단, 직장과 학교, 진료 시간 등을 고려해 의료기관을 선택한다는 설명이다. 거주지 밖에서 의료기관을 이용하는 환자가 적지 않은 상황에서 행정구역을 기준으로 이용 범위를 정하면 선택권이 줄어들 수 있다는 주장도 내놨다.
일차의료의 지역 범위를 세분화하면서 비대면진료와 AI 협진은 확대하는 정부 정책도 문제로 지목했다. 정부가 확정한 "AI 기본의료 전략"에는 보건소·보건지소와 취약지 의원에 AI 진료지원 도구를 보급하고, 섬·산간 지역에서는 방문간호사와 원격지 의사가 참여하는 AI 기반 비대면 재택협진을 시범 운영하는 내용이 담겼다.
전국 72개 책임의료기관을 연결하는 "공공의료 AI 고속도로"와 지역 국립대병원의 AX 거점 조성도 추진된다. 도서·벽지 비대면진료 때 의약품 배송을 허용하고 소아 야간·휴일 진료의 비대면진료 범위를 넓히는 방안은 검토 단계다.
내과의사회는 "대면진료 공간은 좁히면서 비대면 경로는 병원급 의료기관과 공공기관으로 넓히는 방향이 문서로 확인된다"고 주장했다. 비대면진료 확대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진단의 한계와 환자 안전, 의료사고 책임 소재도 정책 설계 단계에서 함께 다뤄야 한다고 요구했다.
소생활권은 보건소와 공공의료시설 등 지역 보건 인프라의 배치 기준으로만 활용해야 한다는 대안도 제시했다. 의원급 의료기관의 진료 범위나 환자 등록을 제한하는 기준으로 사용하지 말고, 진료권을 설계할 때도 거주지뿐 아니라 직장과 학교, 교통망 등 실제 생활 동선을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문위원회 구성에는 개원가 대표를 포함하고, 소생활권 중심의 지역보건체계 구축을 위해 지역보건법 개정에 나설 경우 의료계와 사전에 협의하라고도 요구했다.
내과의사회는 "지역보건과 일차의료의 협력을 강화한다는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국민의 선택을 행정구역으로 가둬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정부가 두 공간 단위를 단순한 의료자원 배치 기준으로 사용할지, 환자 등록과 의료기관 이용까지 연결할지 밝히지 않으면 일차의료 정책을 둘러싼 논란은 진료권 설계 단계에서 다시 불거질 수 있다.
이수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