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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사원에서 회장까지…한국 산업사에 이름 남긴 "샐러리맨 신화" 주역들

주민지 기자 | 입력 26-08-20 23:28



창업주 일가가 아닌 직장인이 기업의 최고경영자까지 오르는 길은 한국 대기업 역사에서 흔하지 않았다. 그러나 생산 현장과 해외 사업장, 연구개발 부서에서 출발해 수십 년간 성과를 쌓으며 최고경영진에 오른 전문경영인들이 있었다. 이들의 이력은 한국 산업이 건설과 섬유에서 전자·반도체로 중심축을 옮겨온 과정과도 맞물려 있다.

대표적인 인물로 이명박 전 대통령이 꼽힌다. 이 전 대통령은 1965년 현대건설에 평사원으로 입사했다. 입사 5년 만에 이사로 승진했고 1977년, 입사 12년 만에 현대건설 사장에 올랐다. 이후 1988년부터 1992년까지 현대건설 회장을 지냈다. 당시 중동 건설시장 개척과 해외 사업 확대 과정에 참여하면서 "샐러리맨 신화"라는 수식어를 얻었다.

SK그룹에서는 손길승 전 회장이 전문경영인 역사의 한 장면을 만들었다. 서울대 상학과를 졸업한 손 전 회장은 1965년 SK그룹의 모태인 선경직물에 평사원으로 들어갔다. 당시 선경은 지금의 대기업 SK와는 거리가 먼 규모였다. 손 전 회장은 경영기획과 신규 사업을 맡으며 그룹 성장 과정에 참여했고 SK해운 대표이사와 그룹 경영기획실장, SK텔레콤 부회장 등을 거쳤다.

그가 그룹 회장에 오른 것은 입사 33년 만인 1998년이었다. 최종현 회장 별세 이후 SK그룹 회장에 추대되면서 평사원 출신 전문경영인이 대기업 그룹 회장을 맡은 이례적인 사례가 됐다. 당시 최 회장이 손 전 회장을 직원이 아닌 "사업동지"라고 불렀다는 일화도 남아 있다.

다만 손 전 회장의 경영 이력은 성공 사례만으로 설명되지는 않는다. 2003년 SK글로벌 분식회계 사건으로 최태원 회장 등과 함께 기소됐고 이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샐러리맨 신화"라는 평가와 함께 기업 경영진의 책임 문제까지 남긴 사례다.

LG전자에서는 생산 현장에서 출발한 전문경영인의 승진 사례가 두드러졌다. 조성진 전 LG전자 부회장은 1976년 금성사에 기술직 평사원으로 입사했다. 대학 졸업장이 아닌 공업고등학교 졸업장을 들고 회사에 들어간 그는 30년 넘게 세탁기 사업에 몸담았다.

조 전 부회장은 세탁기 기술 개발과 프리미엄 가전 경쟁력 강화에 참여하며 "미스터 세탁기"라는 별칭을 얻었다. 이후 사장을 거쳐 2016년 LG전자 부회장으로 승진했고 이듬해 CEO를 맡았다. 기술직 평사원으로 입사한 지 40년 만이었다. 4대 그룹에서 고졸 출신이 부회장에 오른 사례로 당시 재계의 주목을 받았다.

LG전자에서 김쌍수 전 부회장 역시 생산 현장을 기반으로 성장한 전문경영인으로 꼽힌다. 현장 중심의 생산혁신과 경영 방식을 앞세웠고 LG전자 부회장까지 올랐다. 한국 제조업이 생산량 확대에서 품질과 효율을 동시에 따지는 체제로 이동하던 시기에 현장 경험을 경영에 접목한 인물이었다.

삼성전자에서는 반도체와 전자산업의 성장 과정에서 전문경영인들이 최고위직에 잇달아 올랐다. 윤종용 전 삼성전자 부회장은 삼성전자의 글로벌 사업 확대를 이끈 대표적인 전문경영인으로 평가받는다.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 이후 삼성전자가 반도체와 디지털 제품을 중심으로 글로벌 시장에서 몸집을 키우던 시기에 최고경영진을 맡았다.


권오현 전 삼성전자 회장은 반도체 기술자로 출발해 삼성전자 대표이사 부회장과 종합기술원 회장까지 오른 사례다. 메모리와 시스템LSI 등 반도체 핵심 사업을 거쳤고 삼성전자가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사업을 지휘했다. 이후 전문경영인으로 삼성전자 회장에 올랐다.

성과에 따른 보상 규모도 컸다. 권 전 회장은 삼성전자가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했던 2017년 총 243억8100만원의 보수를 받았다. 당시 주요 대기업 총수와 전문경영인을 통틀어 최고 수준이었다. 오너 일가가 아닌 전문경영인이 기업 실적에 따라 최고 수준의 보상을 받은 사례로 기록됐다.

이들의 경력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처음부터 경영권을 보유한 상태에서 회사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특정 사업과 기술, 현장에서 오랜 기간 경력을 쌓았다는 점이다. 손길승 전 회장은 기획과 신규 사업, 조성진 전 부회장은 세탁기 기술, 권오현 전 회장은 반도체를 중심으로 자신의 전문 분야를 축적했다.

동시에 "샐러리맨 신화"라는 표현만으로 서로 다른 이력을 하나로 묶는 데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평사원으로 입사했는지, 다른 기업에서 경력을 쌓은 뒤 영입됐는지, 최종 직책이 계열사 CEO인지 그룹 회장인지에 따라 경력의 성격은 달라진다. 기업별 직급 체계와 회장·부회장의 역할 역시 시대마다 차이가 있었다.

과거에는 한 회사에서 30년 이상 근무하며 최고경영자까지 올라가는 장기 승진 경로가 존재했다. 최근에는 외부 인재 영입과 사업부 중심 인사, 세대교체가 빨라지면서 같은 회사의 평사원이 수십 년 뒤 최고경영진에 오르는 전통적인 형태의 "샐러리맨 신화"를 찾기가 이전보다 쉽지 않다.

결국 이들의 이력에서 남는 것은 직함 자체보다 어떤 사업을 맡아 어떤 결과를 냈느냐다. 오너가 아닌 전문경영인에게 최고경영자의 자리를 열어주는 기업 인사 시스템이 앞으로도 작동할 수 있는지, 성과에 따른 권한과 책임을 어디까지 맡길 것인지는 한국 기업의 지배구조가 계속 답해야 할 문제다.

주민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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