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공행진하던 원·달러 환율이 국민연금의 환헤지 재개 소식에 1520원대로 내려왔다. 미국발 반도체주 급락과 국내 증시 충격으로 외환시장 불안이 커진 가운데, 국민연금의 선물환 매도 움직임이 달러 매도 물량 공급 기대를 키우며 환율 급등세를 일단 진정시켰다.
9일 외환시장에 따르면 달러·원 환율은 야간 거래에서 낙폭을 확대하며 1520원대 중반까지 밀렸다. 한국시간 이날 새벽 2시 기준 달러·원 환율은 전장 서울환시 종가보다 12.60원 내린 1526.50원에 마감했다. 앞선 주간 거래 종가 1535.00원과 비교해도 8.50원 추가 하락한 수준이다.
환율 흐름을 바꾼 재료는 국민연금의 선물환 매도였다. 시장에서는 국민연금이 연초 이후 중단했던 선물환 매도를 재개한 것으로 전해졌다. 국민연금이 해외투자 자산의 환위험을 줄이기 위해 선물환을 매도하면 외환시장에는 달러 매도 물량이 공급되는 효과가 생긴다. 환율이 단기간에 1550원대 중후반까지 치솟자 국민연금이 사실상 환율 상단을 의식한 대응에 나선 것으로 해석됐다.
앞서 원·달러 환율은 국내 금융시장의 불안과 맞물려 급등했다. 미국 반도체주 급락 여파로 코스피와 코스닥이 크게 흔들렸고, 외국인 자금 이탈 우려가 커지면서 원화 약세 압력도 확대됐다. 장중 한때 환율은 1555원대까지 오르며 시장의 경계감을 키웠다.
국민연금의 환헤지 재개는 외환당국의 직접 개입과는 다르지만, 시장에서는 유사한 안정 효과가 있는 조치로 받아들여졌다. 국민연금은 국내 최대 기관투자가로 해외투자 규모가 큰 만큼, 환헤지 비율 조정과 선물환 매도 여부가 외환시장 수급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이번 조치 이후 시장 참가자들 사이에서는 달러·원 환율이 단기 고점에 근접했다는 인식도 확산됐다.
국민연금은 앞서 해외투자 운용 방식을 조정한 새 운용 체계에서 해외투자 환헤지 비율을 기본 15%로 설정한 바 있다. 이는 기존보다 높은 수준이다. 최근 환율 급등 국면에서 선물환 매도가 재개되면서 새 운용 체계에 따른 환위험 관리가 본격적으로 작동한 셈이다.
다만 환율 불안이 완전히 해소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미국 금리 인하 기대 약화, 글로벌 기술주 조정, 국내 증시의 외국인 수급 악화가 동시에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화 약세 압력이 다시 커질 경우 국민연금 환헤지와 외환당국 대응만으로 시장 변동성을 모두 흡수하기는 쉽지 않다.
외환시장은 이번 주에도 미국 증시 흐름과 외국인 주식 매매, 당국의 대응 강도를 주시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반도체 대형주에 대한 외국인 매도세가 이어질 경우 주식시장과 외환시장이 동시에 흔들릴 수 있다. 반대로 증시 낙폭이 줄고 달러 매도 물량이 꾸준히 나오면 환율은 1500원대 초중반에서 숨 고르기에 들어갈 수 있다.
이번 환율 하락은 급등장에 제동을 건 첫 신호로 평가된다. 국민연금의 환헤지 재개가 단기 불안을 누그러뜨렸지만, 고환율을 만든 대외 변수와 국내 증시 불안은 남아 있다. 외환시장이 1520원대 안정을 이어갈지, 다시 1550원선을 시험할지는 외국인 자금 흐름과 당국 대응에 달려 있다.